When Structure Can No Longer Be Heard
불레즈의 음렬주의와 ‘들을 수 있는 음악’에 대하여
내가 불레즈의 초기 작품과 음렬주의를 접하며 지속적으로 느끼는 의문은 그것이 아름다운가, 아름답지 않은가의 문제가 아니다. 음악이 반드시 아름다워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브루크너나 말러의 음악은 때로 고통스럽고 파괴적이며, 바그너의 음악 역시 긴장과 불안, 끝없이 지연되는 욕망으로 가득하다. 그럼에도 이들의 음악은 인간이 시간 속에서 감각하고 기억할 수 있는 방식으로 조직되어 있다. 따라서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음악은 아름다워야 하는가?”가 아니라 “음악은 인간에게 음악으로서 지각될 수 있어야 하는가?”이다.
음악은 무엇보다 시간 속에서 발생하는 예술이다. 인간은 신체적으로 박동과 호흡을 가지고 있으며, 반복과 차이를 감지하고, 앞서 들은 것을 기억하며, 그 기억을 바탕으로 뒤이어 올 사건을 예상한다. 음악에서 박, 강약, 프레이즈, 반복, 동기와 주제는 이러한 인간의 지각 방식과 깊이 관계한다. 이것을 특정 시대의 조성이나 4마디 프레이즈가 ‘자연적’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음악의 양식과 문법은 역사적으로 변화한다. 그러나 반복을 인식하고, 차이를 감지하며, 일정한 단위를 기억하고, 그것들 사이의 관계를 시간 속에서 구성하는 인간의 능력은 음악적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보다 근본적인 조건이다.
서양음악의 역사는 이러한 지각 조건을 고정된 형태로 반복해온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확장해왔다. 비발디의 비교적 명료한 박동과 프레이즈에서 바그너의 길고 유동적인 프레이즈로 이동하면서 청자가 음악을 파악하는 방식도 달라졌다. 직접적인 박동이나 주기성보다 장대한 선율선과 화성적 긴장, 음색과 극적 방향성이 더욱 중요해졌다. 그러나 복잡성이 증가했다고 해서 음악과 인간의 지각 사이의 관계 자체가 폐기된 것은 아니다. 문법은 변했지만 음악은 여전히 기억과 기대를 형성하고, 시간의 방향을 느끼게 했다.
이 지점에서 불레즈의 초기 음렬적 사고에 대한 나의 의문이 시작된다. 《피아노 소나타 제1번》의 음고 조직에서 분석되는 chromatic enclosure를 예로 들 수 있다. 일정한 음정의 양끝에서 출발하여 그 내부의 음고류를 반음계적으로 채워가는 원리는 악보상으로는 분명한 일관성을 가진다. 더구나 동일한 생성 원리가 서로 다른 제스처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이는 전통적 주제를 대신하는 일종의 ‘주제적 행렬’처럼 기능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불레즈는 동시에 각 음을 자유롭게 옥타브 전위시켜 원래 가까이 존재하는 음고류를 서로 다른 음역에 흩어놓는다. 그 결과 분석적으로 존재하는 관계와 청각적으로 지각되는 관계 사이에 간극이 발생한다. 악보를 분석하면 동일한 구조가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지만, 실제 청취에서는 그것을 하나의 반복되거나 변형되는 단위로 포착하기 어렵다. Charles Rosen이 지적한 ‘들리지 않는 클러스터(inaudible presence of the cluster)’라는 표현은 바로 이 역설을 드러낸다.
여기서 나는 작곡적 질서와 음악적 질서는 반드시 같은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어떤 음들이 특정한 규칙에 따라 선택되었다는 사실은 작곡 과정의 일관성을 증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관계가 인간의 청각적 기억 속에서 어떠한 관계로도 성립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곧바로 음악적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는가? 작곡가와 분석가에게만 존재하고 청자에게는 지각될 수 없는 구조라면, 그것은 음악의 구조라기보다 음악을 생산하기 위한 작곡상의 알고리즘에 가까워지는 것은 아닌가.
이 문제는 《Structures Ia》에 이르러 더욱 극단화된다. 여기에서는 음고뿐 아니라 지속시간, 강약, 어택 등의 여러 매개변수가 체계적으로 조직되고, 불레즈는 개인적인 발명을 가능한 한 제거하려 한다. 그는 훗날 이 경험을 회고하며 과도한 질서가 결국 무질서와 동일해지는 지점에 도달했다고 말했다. 역설적으로 이 자기비판은 내가 음렬주의에서 느끼는 문제를 스스로 드러낸다. 구조를 완벽하게 조직하는 것과 그 구조가 음악으로 지각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나에게 음렬주의의 문제는 불협화음이나 추함에 있지 않다. 예술이 조화롭거나 아름다워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삶 자체가 아름다움만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으며, 예술은 고통과 폭력, 불안과 파괴를 표현할 수 있다. 서양 예술의 비극적 전통에서도 고통은 언제나 중요한 대상이었다. 브루크너와 말러의 음악 역시 극심한 고통을 포함한다. 그러나 그 고통은 음악적 시간 속에서 경험된다. 앞에서 들은 것을 기억하기 때문에 현재의 파괴가 파괴로 느껴지고, 기대했던 것이 좌절되기 때문에 비극이 발생하며, 긴장과 지속과 붕괴의 과정을 따라갈 수 있기 때문에 카타르시스가 가능하다. 고통에도 기억과 방향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미적 쾌락이 아니라 지각 가능성(auditory perceptibility)이다. 음악은 아름다울 필요도, 조화로울 필요도, 편안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그것이 시간예술인 이상, 청자가 그 안에서 어떤 관계를 듣고 기억하고 예상하며 경험할 가능성은 남아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음악은 인간에게 전달되는 언어라기보다 음향을 재료로 삼은 추상적 구조물에 가까워질 위험이 있다.
이 점에서 러시아어로 낭송되는 시의 비유를 생각할 수 있다. 러시아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청자에게 그 시의 내부에는 아무리 정교한 의미 구조와 운율이 존재하더라도 그것은 언어적 의미로 전달되지 않는다. 물론 새로운 음악 역시 새로운 청취 방식을 요구할 수 있으며, 낯선 음악적 문법은 학습될 수 있다. 따라서 처음 들었을 때 이해되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 어떤 음악을 부정할 수는 없다. 문제는 학습과 반복 청취 이후에도 그 구조가 청각적으로 지각될 수 있는가이다. 악보 분석을 통해서만 복원 가능한 관계라면 그것을 새로운 ‘음악언어’라고 부르는 데에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불레즈와 전후 아방가르드의 급진성은 Walter Benjamin이 논했던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을 둘러싼 더 넓은 근대적 변화와 함께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이것을 불레즈에 대한 벤야민의 직접적인 영향으로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기계, 복제, 영화, 몽타주, 도시적 충격과 속도가 예술의 지각 방식을 변화시키면서, 유기적 전체성이나 연속적인 서사 대신 단절, 파편, 충돌, 순간적 에너지가 독립적인 미적 가치로 등장했다는 보다 넓은 역사적 맥락에서의 비교이다. 일부 프랑스 아방가르드 영화에서 서사적 내용보다 운동, 충돌, 리듬, 시각적 에너지 자체가 전면에 등장하는 것처럼, 불레즈의 음악에서도 전통적 주제의 기억보다 음향적 사건과 제스처의 에너지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전후 아방가르드의 ‘새로움’에 대해 비판적인 질문을 남기고 싶다. 과거의 문법이 역사적이라는 사실이 곧 그것을 폐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조성, 주제, 프레이즈, 반복, 박동과 같은 요소가 특정 시대의 관습이라는 이유만으로 그것들을 제거하는 것이 반드시 더 진보된 음악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 가운데 일부는 단순한 양식적 관습을 넘어 인간이 소리를 시간 속에서 조직하고 기억하는 방식과 연결되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로운 음악의 과제는 과거의 미적 규범을 보존하는 것도, 단순히 파괴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음악적 언어가 인간의 지각과 어떤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를 묻는 것이어야 한다. 기존의 관계를 해체했다면 그 자리에 다른 방식의 청각적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관계 자체를 작곡 과정의 추상적 체계로 대체한다면, 그것은 분명 음을 재료로 사용하는 정교한 예술일 수 있지만, 왜 그것이 특별히 ‘음악’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피하기 어렵다.
결국 내가 불레즈에게 던지는 질문은 “왜 아름답게 쓰지 않았는가?”가 아니다.
“왜 들을 수 있게 쓰지 않았는가?”
그리고 여기서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소리가 귀에 도달한다는 뜻이 아니다. 시간 속에서 관계를 지각하고, 기억하고, 그것이 변화하는 과정을 경험할 수 있다는 뜻이다. 나에게 음악의 가장 근본적인 미학적 조건은 바로 그곳에 있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지각 가능성’은 음악이 반드시 선율적이거나 연속적이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박수, 충격음, 소음, 파편화된 음향 역시 반복·간격·밀도·방향·에너지의 변화 등을 통해 충분히 음악적 사건으로 지각될 수 있다. 문제는 소리의 종류가 아니라 그 사건들 사이의 관계가 인간의 청각과 시간적 인식 안에서 경험될 수 있는가이다. 따라서 청자가 작곡가가 사용한 구조를 분석적으로 식별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 구조가 음악적 구조로서 의미를 가지려면 적어도 청각적 경험에 어떤 지각 가능한 차이를 만들어내야 한다. 만약 하나의 정교한 구조를 전혀 다른 구조로 대체해도 청각적으로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면, 그 구조의 미학적 필연성은 어디에 있는가? 내가 문제 삼는 것은 불협화, 소음, 파편화 자체가 아니라, 작곡 과정에서 존재하는 구조와 실제 청취에서 경험되는 구조 사이의 단절이다.
+그것들이 음악적 구조라고 주장되려면 인간의 청각과 시간적 인식 안에서 어떠한 관계로든 경험될 가능성이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