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ulez in Occupied Paris: 1943

점령하의 파리와 피에르 불레즈의 음악적 형성: 1943년 12월의 역사적 상황과 메시앙의 사적 교육

1943년 12월 피에르 불레즈는 올리비에 메시앙의 사적 수업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불레즈는 열여덟 살에 불과했으며 파리 음악원에서 메시앙에게 화성학을 배우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를 단순히 젊은 작곡가가 새로운 음악적 교육을 받기 시작한 시점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1943년 12월의 파리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평화로운 유럽이 아니라 독일군의 점령하에 놓여 있던 도시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레즈와 그의 동료들이 메시앙의 주변에 모여 라벨, 드뷔시, 스트라빈스키, 바르토크 등의 작품을 분석하고 비유럽 음악까지 탐구했다는 사실은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1943년 12월 8일의 세계

제2차 세계대전은 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되었으며, 프랑스는 1940년 6월 독일에 패배하였다. 파리는 독일군의 점령하에 들어갔고, 이러한 상황은 1944년 8월 파리 해방까지 지속되었다. 따라서 불레즈가 메시앙의 사적 수업에 참여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1943년 12월 8일은 프랑스가 아직 해방되기 약 8개월 전의 시점이다.

1943년 말은 동시에 전쟁 전체의 흐름이 변화하고 있던 시기이기도 하다. 독일은 여전히 유럽의 광범위한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으나, 1943년 2월 스탈린그라드에서 패배하고 같은 해 여름 쿠르스크 전투에서도 소련군에게 밀리면서 동부전선에서 점차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이탈리아에서는 1943년 7월 무솔리니 정권이 붕괴하고 9월 이탈리아 정부가 연합국과 휴전하였다. 그러나 독일군이 이탈리아 중북부를 점령하면서 전투는 계속되고 있었다.

불레즈가 메시앙의 수업에 참여하기 직전에는 전후 유럽의 향방을 결정하는 중요한 외교적 사건도 발생하였다. 1943년 11월 28일부터 12월 1일까지 루스벨트, 처칠, 스탈린이 테헤란에서 회담을 열었으며, 이 자리에서 1944년 서유럽에 대규모 제2전선을 형성한다는 계획이 구체화되었다. 이것이 이후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실행되는 Operation Overlord이다. 즉 불레즈가 점령된 파리에서 음악을 공부하고 있던 바로 그 시기에 연합국 지도부는 프랑스를 군사적으로 탈환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아시아에서도 전쟁은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중국은 1937년부터 일본과 전면전을 벌이고 있었으며, 미국은 1941년 진주만 공격 이후 유럽과 태평양에서 동시에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다. 특히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에서는 루스벨트, 처칠, 장제스가 일본 패전 이후의 동아시아 질서를 논의하였다. 12월 1일 발표된 카이로 선언에는 일본이 중국으로부터 획득한 영토를 반환할 것이라는 원칙과 더불어 한국이 장차 자유롭고 독립된 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었다.

따라서 1943년 12월은 전쟁이 끝난 시기가 아니라 오히려 유럽과 아시아에서 대규모 전투와 점령, 학살이 계속되는 가운데 전쟁의 주도권이 추축국에서 연합국으로 이동하고 있던 시기이다. 동시에 홀로코스트가 진행되고 있었으며, 점령지역에서는 강제노동, 체포, 처형과 저항운동이 일상적으로 발생하고 있었다.

2. 독일 점령하의 파리에서 음악을 논의한다는 것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면 1943년 파리에서 젊은 음악가들이 모여 현대음악을 분석하고 토론했다는 사실은 언뜻 모순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독일 점령기에도 파리의 문화생활이 완전히 중단된 것은 아니었다. 파리 음악원은 계속 운영되었으며 극장과 콘서트홀에서도 공연이 이루어졌다. 물론 이는 검열과 정치적 통제, 물자 부족, 이동 제한, 유대인 음악가에 대한 박해라는 비정상적인 조건 아래 유지된 문화생활이었다.

메시앙 자신도 전쟁과 무관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프랑스군으로 복무하다가 1940년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으며, 포로수용소 Stalag VIII-A에서 《시간의 종말을 위한 사중주》를 작곡하였다. 이 작품은 1941년 1월 수용소에서 초연되었다. 석방된 메시앙은 파리로 돌아와 같은 해 파리 음악원의 화성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따라서 불레즈가 1943년에 만난 메시앙은 전쟁과 포로수용소를 직접 경험한 작곡가였다.

불레즈는 음악원의 정규 화성학 수업뿐 아니라 음악원 밖에서 이루어진 메시앙의 사적 수업에도 참여하였다. 이 모임에는 이본 로리오, 세르주 니그, 이베트 그리모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메시앙의 집에서 모였으나 이후 이집트학자이자 현대음악 후원자였던 기 베르나르-들라피에르의 파리 6구 비스콩티 거리 자택에서도 수업이 이루어졌다. 이 모임은 이후 ‘Les Flèches’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사적 공간은 당시의 공식적인 음악교육과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당시 파리 음악원의 교육과정은 비교적 보수적이었으며 20세기의 새로운 음악을 체계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일반적인 교육방식이 아니었다. 반면 메시앙의 사적 수업에서는 라벨의 《어미 거위》를 이야기와 피아노 듀엣, 관현악법의 관계까지 연결하여 장시간 분석하였으며, 스트라빈스키의 《페트루시카》, 드뷔시의 《유희》, 바르토크의 바이올린 소나타와 현악사중주, 《현과 타악기와 첼레스타를 위한 음악》 등 당시로서는 대담한 현대 레퍼토리를 다루었다. 쇤베르크의 《달에 홀린 피에로》와 베르크의 《서정 모음곡》 역시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따라서 점령하의 파리에서 음악을 논의하는 것은 현실로부터 완전히 격리된 행위였다기보다, 공식적인 제도의 제한을 벗어나 새로운 지적·예술적 가능성을 탐구하는 행위였다고 볼 수 있다. 전쟁은 국제적인 이동과 문화교류를 크게 제한하였지만, 악보와 음반, 개인 소장 자료, 그리고 음악가들 사이의 사적인 네트워크는 여전히 새로운 음악을 전달하는 통로로 기능하였다.

3. 전쟁 중의 파리에서 세계의 음악을 발견하다

메시앙의 사적 수업에서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은 관심의 범위가 유럽 현대음악에 한정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불레즈와 그의 동료들은 발리의 가믈란, 케착, 티베트 음악, 인도 음악 등 비서구의 음악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베트 그리모는 이러한 관심에서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후 저명한 민족음악학자가 되는 그리모는 불레즈를 기메 박물관의 음반 아카이브와 연결하였으며, 불레즈는 그곳에서 비유럽 음악의 녹음을 접하고 직접 채보하는 작업까지 수행하였다.

이 점은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실제 세계에서는 유럽과 아시아가 전쟁으로 분열되어 있었으며 젊은 불레즈가 자유롭게 다른 지역을 여행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점령하의 파리에서 이루어진 작은 사적 음악 모임에서는 오히려 유럽 음악의 경계를 넘어서는 탐색이 진행되고 있었다.

불레즈는 훗날 이러한 경험을 회고하면서 유럽 음악만이 자신들의 연구 중심이 아니었으며 아시아와 아프리카 음악을 통해 음악적 전통이 유럽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설명하였다. 특히 그는 이 경험을 ‘지워지지 않는 낙인(indelible branding)’과 같은 것으로 묘사하였다. 이는 비유럽 음악과의 접촉이 단순한 이국적 호기심이 아니라 그의 음악적 사고에 강력한 충격을 주었음을 의미한다.

4. 전쟁과 전후 아방가르드 사이의 불레즈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불레즈의 음악적 형성기를 단순히 ‘전후 아방가르드’라는 범주로 시작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불레즈가 유럽 전후 음악의 대표적 인물로 등장하는 것은 전쟁 이후이지만, 그를 그렇게 만든 지적·음악적 경험은 이미 전쟁 중에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1943년 열여덟 살의 불레즈는 점령하의 파리에서 메시앙의 수업에 참여하였다. 1944년 8월 파리가 해방되었고, 1945년 유럽에서 전쟁이 끝날 무렵 불레즈는 스무 살이었다. 바로 이 시기를 전후하여 《Douze Notations》, 《Trois Psalmodies》 등의 초기 작품이 등장하였으며, 이후 《피아노 소나타 제1번》과 《피아노 소나타 제2번》으로 이어지는 급격한 작곡적 발전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불레즈의 급진성을 전쟁이 끝난 뒤 갑자기 등장한 미학적 태도로만 해석하기는 어렵다. 그의 형성기에는 서로 다른 세 개의 세계가 중첩되어 있었다. 하나는 전통적인 파리 음악원의 아카데미즘이고, 다른 하나는 메시앙을 중심으로 한 현대음악의 실험적 분석이며, 마지막 하나는 전쟁과 점령으로 기존 유럽 질서 자체가 붕괴하고 있던 역사적 현실이다.

특히 메시앙의 사적 수업은 이 가운데 두 번째 영역의 중심에 위치하였다. 이곳에서 불레즈는 드뷔시, 라벨, 스트라빈스키, 바르토크, 쇤베르크, 베르크를 발견하는 동시에 발리와 인도, 티베트 등 유럽 외부의 음악적 사고와도 접촉하였다. 이는 기존의 음악적 권위와 전통을 상대화할 수 있는 경험이었다.

결국 1943년 12월이라는 날짜는 불레즈의 전기에서 단순한 수업 시작일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밖에서는 기존의 유럽 정치질서가 전쟁을 통해 파괴되고 있었고, 점령된 파리의 작은 사적 공간 안에서는 젊은 음악가들이 기존의 유럽 음악질서를 넘어설 새로운 언어를 탐색하고 있었다. 물론 전쟁의 파괴와 음악적 급진주의 사이에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설정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그러나 불레즈의 음악적 형성이 전쟁 이후의 안정된 환경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전쟁과 점령이라는 극단적인 역사적 조건 속에서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1943년의 불레즈를 바라보면, 이후 그가 전통적인 형식과 음악언어에 대해 보여준 극단적인 비판 역시 보다 넓은 역사적 지평에서 이해할 수 있다. 전후 유럽 아방가르드의 불레즈는 1945년 이후 갑자기 출현한 것이 아니다. 그는 이미 점령하의 파리에서 메시앙과 동료들을 통해 자신이 알고 있던 음악적 세계의 경계를 허물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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