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ilures of Contemporary Composition-Again
Schonberg 1981, 199-202
이 글은 1962년 1월 14일자 글(위 참조)이 불러일으킨 엄청난 편지 쇄도에 응답하여 작성된 것이다. 20년이 지난 지금 돌아보건대, 나는 1962년에 활동하던 어떤 작곡가도 "진정으로 강력한 미국 작곡가"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1960년대 미국 아방가르드의 기관지였던 Perspectives of New Music에 그렇게도 두드러지게 등장한 이들은 누구였던가? 밀턴 배빗, 엘리엇 카터(그 당시 ‘빅 투’), 시모어 시프린, 루카스 포스, 찰스 워리넨, 도널드 마르티노, 빌리 짐 레이튼, 조지 펄, 아서 버거, 존 M. 퍼킨스, 조지 로크버그, 랄프 셰이피, J.K. 랜달, 레이런 힐러, 앤드루 임브리, 멜 파월, 하비 솔버거, 조지 크럼 — 잡지 지면을 대충 훑어보면 이렇다. 많은 전문가들이 카터를 주요 작곡가로 평가할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나는, 71세가 되도록 (글을 쓰는 시점에서) 대중을 끌어들이지 못한 작곡가에 대해서는 의심을 갖는다. 나는 같은 논리를 로저 세션스와 그의 음악에도 적용하겠다. 그렇게도 많이 회자된 배빗은 강력한 창작 인물이라기보다는 교육자이자 구루로서 더 영향력이 있었던 것 같다. 크럼만이 유일하게 그의 음악이 어느 정도 유통되고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나머지 대부분은 전문가들에게만 알려진 이름들이다.
그래서, 비난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몇 주 전, 이 칼럼은 정말 강력한 젊은 미국 작곡가를 찾기 위해 나섰지만, 그런 인물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자 편지가 쏟아지기 시작했는데, 그 요지는 이 글쓴이가 (엘라 로건이 뮤지컬 피니언스 레인보우에서 불렀던 대사처럼) "이 인간은 못 돼먹었고/온갖 욕을 다 먹어야하는 사람"라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편지는 작곡가들이 보낸 것이었다. 이는 마치 적이 벌집에 접근했을 때 전투벌이 내는 공격적인 윙윙거림처럼, 조건반사적으로 쏟아진 항의였다.
그 편지들의 공통된 주장은, 작곡가는 악보에 음을 적는 존재이자 신성한 신비를 수호하는 존재로서, 존중과 지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음을 종이에 더 복잡하게 적을수록 더 큰 지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정말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내가 문제 삼은 것은 많은 현대 작곡의 철학과 미학이었다. 불협화음이든, 12음 기법이든, 고도의 음렬 기법이든, 그런 기술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낭만주의 또한 마찬가지다. 지금은 강력한 낭만주의적 부흥이 일어나고 있지만, 나는 무어(Moore)와 워드(Ward)의 파생적 낭만주의는 케이지(Cage)와 슈톡하우젠(Stockhausen)의 실험작만큼이나 (아니, 오히려 그보다 더) 불쾌하게 느껴진다.
불협화음이라는 말은 이제 그다지 의미가 없다. 바르톡의 중기 작품에도 오늘날 들을 수 있는 어떤 작품만큼이나 불협화음이 들어 있다. 아이브스의 Housatonic at Stockbridge 같은 곡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불협화음을 통해 어떤 표현적 가치를 전달하느냐는 것이다. 단지 불협화음을 위한 불협화음은, 단지 협화음을 쓰기 위한 협화음만큼이나 미학적으로 공허하다. 역사상 거의 모든 위대한 작곡가들이 자신이 살던 시대에는 불협화음 작곡가라고 불렸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건 모차르트와 베토벤 뿐만 아니라, 쇼팽과 슈만, 말러와 스트라빈스키, 바르톡에게도 해당된다.
하지만 역사상 이렇게까지 한 시대에 많은 수의 불협화음 작곡가들이 몰려 있던 적은 없었다. ‘악보 위의 음악(paper music)’(또는 "눈의 음악")은 종이 위에 보기에는 아름답고 분석하기에는 매우 매력적인 음악을 말한다. 문제는 실제 연주에서 작곡가가 정교하게 계획해 놓은 관계들을 청중의 귀가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어떤 작품의 마지막 악장이 첫 악장의 역행(retrograde) 구조, 즉 앞뒤가 뒤바뀐 동일한 음악이라는 것을 지적으로는 알 수 있다. 하지만 귀는 그것을 느끼지 못하며, 오직 눈과 머리만이 그것을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12음 기법 음악은 이러한 작곡적 '트릭'에 적합하다. 문제는 이런 트릭이 너무 자주 음악 자체의 본질을 대체하는 것처럼 여겨진다는 점이다.
이것은 음악의 문법일 뿐, 음악 그 자체는 아니다. 우리는 모두 어제의 혁명이 오늘의 진부함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모든 아방가르드 현상은 결국 자신만의 아카데미즘에 갇히기 마련이다. 어느 시대에나 두 가지 미학이 존재한다 — 현재의 미학과 미래의 미학. 이 지점에서 ‘문화적 시차’(cultural lag)가 작용한다. 대부분의 대중은 — 이것은 언제나 그랬다 — 현재의 미학에 충실하다. 오늘날 우리 주류음악은 대략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의 음악을 뜻한다. 그리고 12음 작곡가들, 전자음악 작곡가들, 심지어 다다(Dada)까지 이어질 것이고, 이 모든 것이 일반 대중도 이해할 수 있는 공통된 언어 속으로 통합되어야 한다.
작품이 새롭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당연히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단지 희망적 사고에 불과하다. 어느 시대든 창작의 대부분은 이류 작품이다. 우리의 시대도 예외는 아니다. 지금까지 바르톡(Bartók), 본 윌리엄스(Vaughan Williams), 프로코피예프(Prokofiev), 스트라빈스키(Stravinsky), 풀랑크(Poulenc), 힌데미트(Hindemith), 쇤베르크(Schoenberg) 같은 인물들을 떠올려보면, 우리는 그리 나쁘지 않은 성과를 내왔다. 하지만 이 큰 이름들 아래에는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기술은 있지만, 그 메시지를 기억에 남게 만들 천재성은 없는 수많은 작곡가들이 존재한다.
내가 내린 결론에 분노한 편지의 대부분은 비평가의 의무가 모든 이의 등을 토닥여주는 것이라고 믿는 듯하다. 이것은 흔히 "재능을 격려하는 일"이라고 불리며, "건설적인" 태도라 여겨진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응석받이(coddling)로 만드는 것’이라 부른다. 무분별한 칭찬은 이 세대의 해악이 되었다. 너무 많은 비평가들이 반동적이라 불릴까 두려워하며,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 부족해서, 유행하는 모든 것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서로 격려하고 과찬하는 행태에 빠져 있다. 이는 음악 평론가들뿐 아니라 다른 예술 분야의 비평가들도 마찬가지다. 한 가지 위안이 되는 점은, 어떤 비평도 예술의 진정한 발전을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좋은 평론이 어떤 예술가나 작곡가를 영원히 유명하게 만든 적은 없으며, 나쁜 평론이 그를 파멸시킨 적도 없다. 결국 한 작곡가가 성공할지는, 한 편의 공연이 아니라 작품 전체에 달려 있다. 결국 잘못된 비평 판단이 초래하는 일은 단 하나, 결국 비평가 자신을 바보처럼 보이게 만든다는 것뿐이다 — 그리고 진정한 비평가라면 이런 결과를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만약 비평가가 자신의 말이 마치 성경이나 법전처럼 신성불가침하다고 여긴다면, 바닥에 붙잡아두고 몸에 바람 빠지도록 핀이라도 꽂아야 한다.
결국 좋은 음악은 비평가의 도움이 있든 없든 살아남게 되어 있으며, 진정한 거장들 — 천재들 — 은 스스로의 길을 간다. ‘오해받은 천재’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말 자체가 모순이다. 반 고흐는 아마도 자신의 생전에 헌신적인 지지를 받지 못한 유일한 위대한 창작자일 것이다. 슈베르트조차도, 당시에는 그의 중요성이 완전히 인식되지 않았을 수 있어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독일 최고의 가곡 작곡가로 인정받았으며, 그의 부고 기사들이 이를 보여준다. 그의 영향력은 너무나 커서, 젊은 시절의 로베르트 슈만은 슈베르트의 사망 소식을 듣고 밤새도록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역사가 보여주듯이, 어떤 시대에 가장 성공한 인물들이 반드시 오랫동안 기억되는 인물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슈포어(Spohr), 모셸레스(Moscheles), 헬러(Heller), 보일디외(Boieldieu), 칼크브레너(Kalkbrenner), 훔멜(Hummel)같은 이들은 100여 년 전에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 뒤 금세 잊혀지고 말았다. 이들은 리더가 아닌, 추종자들이었다. 진정한 거장들은 거의 즉시 그 시대에 자신만의 흔적을 남기며, 충분히 오래 살기만 하면 (슈베르트는 결국 31세에 사망했다) 그들의 영향력은 엄청나다. 이들은 음악의 흐름 자체를 바꾸어 놓는다. 우리 시대에는 스트라빈스키와 쇤베르크가 그러했다.
하지만 내가 앞서 쓴 것처럼, 현재 미국의 젊은 작곡가들 가운데 그런 충격을 줄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인물은 없는 것 같다. (만약 그런 작곡가가 있다면, 그의 작품이 알려지지 않았을 리가 없다.) 기술을 가진 작곡가들은 어디에나 널려 있다. 그러나 찰스 아이브스(Charles Ives) 같은 같은 밝고 강렬한 내면의 불꽃을 지닌 이는 없다. 아방가르드의 획일성이 우리 창작 환경 대부분에 퍼져 있으며, 오늘날 많은 젊은 작곡가들이 들을 이끄는 것은 소란스러운 몇몇 하사관 아래 그에 맞춰 정렬 행진을 하고 있는 듯하다.
1962년 2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