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ulez Trips Up Downtown

Schonberg 1981, 206-210

피에르 불레즈가 뉴욕에 왔을 때, 곧 분명해진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는 한 가지를 탁월하게 알고 있었고, 그것은 바로 새로운 음악이었다. 그는 그 음악의 열렬한 전도자이자 신봉자였으며, 교육받기를 거부하는 청중을 교육하려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그 이전에도 실패한 이들이 있었다. 레너드 번스타인이 필하모닉과 함께 아방가르드 시리즈를 시도했으나 그것은 재앙이었다. 그 원인 중 일부는 오케스트라 자체의 저항 때문이었다. (그리고 오케스트라는 “렌니는 그 음악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불레즈 역시 더 나은 결과를 낼 수는 없었다. 그리고 아래에서 언급 되었듯이, 그가 팔려고 애썼던 2류 음악으로는 그가 할 수 있는 거의 없었다.

뉴욕 셰익스피어 페스티벌 공공극장의 마틴슨 홀은 라파예트 스트리트에 있는 오래된 건물 3층에 위치해 있다. 그곳은 약 300석 규모의 꽤 작은 방으로, 지난 금요일 첫 번째 '미래의 만남'을 위해 약 350장의 티켓이 팔렸다. 초과 인원을 수용하기 위해 바닥에 쿠션들을 흩어 놓고 그 위에 앉도록 했다.

피에르 불레즈는 목에 라발리에 마이크를 착용한 채 병사들에게 격려의 말을 전하고 있었다. 지휘자 중에서 이렇게 충실하고 숭배하는 군대를 가진 이는 없었다. 이 네 번의 공연 시리즈는 불레즈의 아이디어였다. 작곡가와 청중 사이의 격차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아방가르드를 지지하며, 뉴욕 필하모닉이 실험을 위한 장이 아님을 깨달은 불레즈는 이 격차를 좁히기 위해 네 번의 다운타운 공연을 구상했다.

이날은 긴 저녁이었다. 저녁 7시부터 자정까지. 공식 시작 시간은 7시로 기재되어 있었지만, 20분이 지나서야 연극의 "주인"인 조셉 팝(Joseph Papp)이 일어나 불레즈를 소개했다. 팝은 뉴욕 필하모닉과 일반적으로 예술의 "탈중앙화"에 대해 긍정적인 말을 했다. 그 후 불레즈는 기꺼이 무대에 올라섰다. 그는 회색 줄무늬 정장, 파란색 터틀넥 스웨터, 갈색 스웨이드 신발을 입고 있었다 (잠시 후 자켓을 벗었고, 마틴슨 홀은 덥기 때문에 대부분의 남성 관객들도 자켓을 벗고 넥타이를 풀었다).

불레즈는 짧고 단절된(staccato) 영어를 짙은 프랑스 억양과 함께 구사했고, 그는 분명히 행복해 보였다. 이 일은 그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는 약 30분 동안 시리즈의 취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뉴욕은 다른 장소에서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음악적 장치(service)를 필요로 한다고 말했다. 현대 음악은 제대로 된 관점에서 다뤄져야 한다. 그는 이 시리즈에서 “콘서트”라는 단어를 쓰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콘서트에는 너무 많은 “전통”이 있으며, 그 전통은 우리 모두가 싸워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만남"은 작곡가, 연주자, 그리고 대중 간의 대화를 시작하는 자리였다. 이 만남은 자유롭고 비공식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이었다. 불레즈는 작곡가가 청중에게 말을 건네는 일은 아주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렇지 않으면 직접적인 관계는 결코 형성될 수 없다고 말했다.

왜 마틴슨 홀인가? 그것은 전통적인 콘서트홀의 범위 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작곡가들은 순수 음악의 감각을 넘어서서 통합을 추구하고 있었다. 점점 더 많은 작곡가들이 정확한 경계를 싫어하고, 그들은 순수 음악과 연극 사이의 간극을 없애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에서 실제로 연주될 음악에 대해 그가 이 프로그램에서 짧은 곡들만을 선정한 이유도 설명했다. 그렇게 하면 관객의 반응이 좋은 곡은 반복하기 쉬우며, 그런 음악은 분석하기도 더 쉽기 때문이다. 질문이 있느냐고 물었다.

질문은 없었다. 불레즈는 당황하고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이리저리 둘러보았고,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결국 누군가가 그를 불쌍히 여겨 질문을 했다. 얼음이 깨지자 질문이 줄줄이 이어졌다. 불레즈는 능숙하게 그것들을 처리했다. 그는 말이 많은 연설자였을 뿐 아니라, 신념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접근 방식에는 놀랄 만큼 거만함이 없었다.

그는 누구에게도 깊은 인상을 주려고 하거나 자신을 과시하거나 자신의 자아를 만족시키려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현대 음악(그리고 일반적으로 현대주의 전반)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마치 키케로가 아테네 사람들에게 연설하는 것처럼, 박식하고, 이성적이며, 합리적이었다. 그 아래에는 타오르는 열정과 강력한 지성이 있었다.

불레즈는 질의응답을 마무리하며 가벼운 농담도 몇 개 던졌다. 그리고 나서 음악이 시작되었다. 두 곡이 연주되었는데, 마리오 다비도프스키(Mario Davidovsky)의 ‘싱크로니즘 No. 6’는 피아노와 합성 테이프를 위한 작품이었고, 찰스 우오리넨(Charles Wuorinen)의 ‘하모니의 정치’는 마임, 배우들, 세 명의 가수(오케스트라 내), 그리고 소규모 앙상블을 위한 연극 작품이었다.

불레즈가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동안 청중들은 감탄하며 들었다. 그가 말하는 모든 것에 동의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작곡가와 청중 사이에는 역사살 그 어느 때보다 더 큰 간극이 있다. 이 간극은 음악의 상태가 건강하게 유지되려면 반드시 좁혀져야 한다. 레퍼토리는 보충되어야 한다. 교향악단과 오페라 하우스는 새로운 소리, 새로운 형태, 새로운 철학의 자극이 필요하다. 이에 대한 반박은 어디에도 없었다. 불레즈의 말은 옳았다.

그런 다음 음악을 들었다. 다비도프스키의 작품은 예측 가능한 합성음 효과와 후기 총렬주의(post-serial)기법의 피아노 부분이 결합된 학구적인 느낌의 곡이었다. 테이프 음악에 대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작품이 진부하고 독창적이지 못하게 들렸을 것이다. 이를 연주한 폴 제이콥스는 음악이 무엇인지 설명했다(작곡자는 본래 참석해야 했으나 디스크 탈구로 침대에 있었다). 제이콥스의 분석은 기술적이었고, 그는 음악의 표현적 특성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관객 중 한 사람이 그에게 감정적 특성에 대한 질문을 직접 던졌고, 그는 그것이 좋다고만 말했다. 그 후, 7분짜리 작품이 다시 연주되었지만 두 번째로 들을 때도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다시 제이콥스에게 음악의 감정적 특성에 대해 질문하자 그는 “나는 음악을 그런 방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는 이 작품을 즐긴다. 긴장감이 낮고, 복잡하지 않은 재료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엄격한 음악이 아니다.”

20분 간의 휴식이 있었고, 그 후 우오리넨이 등장했다. 그는 자신의 악보에 대해 몇 마디를 했다. 그는 이 작품이 순수한 음악적 경험으로 볼 수도 있고, 연극적 경험으로 볼 수도 있으며, 두 가지의 결합으로 볼 수도 있다고 말했다. 기본적으로 이것은 문화적 상호 소통을 시도한 작품이었다—중국 고전에서 영감을 얻었고, 서양식으로 다루었다고 했다. 작품이 연주되었고, 약 40분간 지루한 시간이 흘렀다. 가수들은 12음 기법의 음절 확장 방식을 이용해 영어를 왜곡하고, 일반적인 학구적인 조직 방식과 1960년대 식의 무주제주의(athemacitism)를 보여 주었다. 개성도 없었고, 매력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불레즈는 이를 분석했다. 그는 다양한 관계와 작곡 기법을 보여 주었고, 그때마다 조지 버나드 쇼가 햄릿의 독백에 대한 분석이 떠올랐다: “셰익스피어는 일반적인 서두를 생략하고, 주제를 즉시 부정사의 형태로 발표한다. 그 짧은 연결 구절 후, 그 짧은 구절이지만 반복에서 중요한 대안적이고 부정적인 형태들을 우리는 인식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콜론에 도달한다…”

그리고 이것이 불레즈의 오류이자, 새로운 음악을 선전하는 많은 사람들이 저지르는 오류이다. 작품의 형식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리고, 아이디어의 질이나 표현적 의미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우오리넨의 악보는 그 어떤 작곡적 섬세함이 있더라도, 거만하고 지루한 작품이었으며, 대다수의 관객은 이에 동의하는 것 같았다.

작품이 끝났을 때, 많은 관객들이 떠났고, 마지막 질문과 답변 시간에는 약 100명이 남아 있었다. 불레즈가 사회를 맡고, 우오리넨, 리처드 하워드, 제임스 시라이트가 참여했다. ‘전통’이라는 무거운 짐에 대한 불평이 많았고, 50년간 문화가 뒤처졌다는 탄식도 이어졌다. 그러나 만약 한 예술 작품이 50년 동안 자리를 잡지 못했다면, 그것은 어쩌면 그 책임이 대중이 아닌 작품 자체에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아무도 깨닫지 못한 것 같았다.

그것은 매우 지루한 대화였다. 패널 멤버들 간에는 기본적인 의견 차이가 없었다. 모두 불레즈의 편에 있었다. 그 사이 불레즈는 자신의 빛나는 지성을 발휘하여 대화를 이어갔다. 하지만 대화가 끝날 무렵 그는 마치 카니발의 장사가처럼 관객을 끌어들이려 애쓰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만약 그가 더 나은 품질의 작품을 선택했다면 더 설득력 있는 주장을 할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이처럼 매력 없는 콜롬비아-프린스턴의 학구파 작품들이 앞으로 ‘엔카운터 이브닝’의 특징이 된다면, 불레즈의 쇼에 관객을 끌어들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1971년 10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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