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erre Boulez's Musical Language and Compositional Aesthetics
Boulez’s compositional path pp.6-10.
Goldman, Jonathan. The Musical Language of Pierre Boulez: Writings and Compositions. Music since 1900.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1.
피에르 불레즈는 20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작곡가 가운데 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의 개인적 성장 과정은 서양 예술음악의 역사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그는 예술적 모더니즘의 역사에서 핵심적인 인물이었으며, 1945년 이후 음악 아방가르드의 지도자이자 대표적 인물로 인식되어 왔다. 1971년 뉴욕 필하모닉과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로 동시에 임명된 이후, 그리고 그 밖에도 수많은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면서, 그는 20세기 전반 모더니즘 음악의 고전으로 자리 잡은 스트라빈스키, 쇤베르크, 베베른, 바르토크, 베르크 등의 작품을 연주회와 음반을 통해 소개함으로써, 청중의 음악 감상 방식을 변화시키고자 꾸준히 노력하였다. 또한 불레즈는 특히 프랑스에서 음악 제도의 발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도멘 뮈지칼(Domaine musical), 음향·음악 연구조정연구소(IRCAM), 앙상블 앵테르콩탱포랭(Ensemble InterContemporain), 시테 드 라 뮈지크(Cité de la musique)의 설립으로 이어지는 여러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추진하였다.
불레즈는 또한 매우 왕성한 저술가이기도 했다. 음악사에서 중요한 전환점마다 발표한 그의 공개적인 발언은 이후의 음악적 흐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으로 1951년에는 12음기법의 창시자인 쇤베르크의 죽음을 계기로 「쇤베르크는 죽었다(Schoenberg est mort)」를 발표했고, 이듬해에는 「어쩌면(Eventuellement)」에서 12음 언어의 필연성을 인식하지 못한 모든 작곡가의 작업은 '무의미하다'고 단언하는 도발적인 주장을 펼쳤다. 원문에서는 '무의미(FUTILITY)'라는 단어를 모두 대문자로 조판하여 그 공격적인 어조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특히 프랑스어권에서 불레즈의 위상은 그의 음악뿐 아니라 방대한 저술 활동에도 크게 힘입고 있다. 수천 쪽에 이르는 그의 글은 미셸 푸코와 같은 공공 지식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푸코는 불레즈와 중요한 대담을 발표했을 뿐 아니라, 그가 프랑스 최고 권위의 학술기관인 콜레주 드 프랑스(Collège de France)에 임명되는 과정에도 관여하였다. 질 들뢰즈 역시 불레즈에 대해 폭넓은 글을 남겼다. 또한 불레즈의 음악과 저술은 철학, 문학, 미술사와 긴밀하게 교차하며, 폴 클레, 르네 샤르, 폴 발레리, 앙리 미쇼, 스테판 말라르메, 제임스 조이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상가·시인·예술가에 대한 풍부한 성찰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피아노 소나타 제1번》(1946)과 플루트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티네》(1946)와 같은 초기 작품들은, 불레즈가 베베른과 쇤베르크로부터 계승된 음렬 언어를 얼마나 충실히 자기 것으로 흡수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이러한 음렬 언어를 폴란드 출신 작곡가 르네 레이보비츠(1913–1972)에게 비공식적인 개인 지도를 받으며 익혔다. 또한 이 작품들은 리듬에 대한 그의 접근법이 1944년부터 파리 음악원에서 그의 스승이었던 올리비에 메시앙(1908–1992)에게 크게 빚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불레즈라는 인물이 대중에게 아방가르드와 동일시되기 시작한 것은 1950년 《피아노 소나타 제2번》(1946–48)이 출판되면서부터였다. 이 작품은 네 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치밀한 대위법적 양식으로 특징지어지고, 연주자에게 엄청난 수준의 기교를 요구한다. 불규칙하고 경련하듯 분출하는 제스처가 이 악보 전체에 스며들어 있는데, 이는 이전의 피아노 문헌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방식이다. 이러한 제스처는 불레즈가 "효과적인 예술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광기(delirium)를 받아들여야 하며, 그렇다, 그것을 조직해야 한다."라고 말한 것을 상기시킨다. 날카롭고 격렬한 제스처와 서로 겹쳐지는 여러 층위로 이루어진 이 소나타는, 당시 불레즈가 음악 잡지 『Polyphonie』의 지면에서 표현했던 자신의 바람, 즉 음악은 "앙토냉 아르토의 노선을 따라, 히스테리이자 마법이며, 격렬할 만큼 현대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실현하고 있다. 이러한 선언은 흔히 불레즈에게 귀속되곤 하는 음악적 합리주의와 그의 실제 사유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피아노 소나타 제2번》에서도 고전적 형식이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니다. 베토벤적 소나타의 모델은 작품 전체에 여전히 뚜렷하게 존재하며, 전통적인 스케르초 악장과 트리오까지 그대로 포함하고 있다.
그의 짧지만 결정적인 '자동기술(automatic)' 작곡 시기에,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Structures, 제1권》(1951–52)의 첫 번째 곡과 흔히 연관되는 '적분적(integral)' 또는 '총렬적(total)' 음렬주의를 통해, 불레즈는 음고 이외의 음악적 매개변수들까지 음렬화하는 가능성과, 그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재료의 증식을 탐구하였다. 한동안 이러한 접근법의 생산성을 확신했던 불레즈는, 원래 이 첫 번째 곡에 바우하우스 화가 파울 클레의 그림 제목을 따서 《비옥한 땅의 한계에서(At the limit of fertile ground)》라는 의미심장한 제목을 붙였다. 이 시도는 훗날 불레즈 자신이 인정했듯이 "어느 정도 터무니없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not lacking in absurdity)." 그러나 그것은 음악적 담론을 하나의 원리 아래 통합하려는 열망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며, 불레즈는 이후의 작품들에서 다른 방법들을 통해서도 이러한 목표를 계속 추구하게 된다. 작곡을 완전히 통제하려는 이러한 열망은 분명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이기도 했다. 같은 시기 총렬주의를 시도했던 불레즈의 동료 작곡가들을 보더라도 이를 알 수 있는데, 그 결과 카렐 후이바르츠(Karel Goeyvaerts)의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1950–51), 슈토크하우젠의 《Kreuzspiel》(1951), 장 바라케의 《소나타》(1952), 미셸 파노의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1952)와 같은 점묘주의적(pointillistic) 작품들이 탄생하였다.
음렬주의를 중심으로 자신의 작곡 방향을 확립한 이후, 불레즈는 자신의 음악과 뜻을 같이하는 동시대 작곡가들의 음악을 널리 알리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54년, 도멘 뮈지칼(Domaine musical)은 파리 중심부의 테아트르 뒤 프티 마리니(Théâtre du Petit-Marigny)에서 분명한 아방가르드 성향을 띤 첫 번째 연주회를 개최하였다. 전후(戰後) 보수적인 음악회 관객 문화 속에서 도멘 뮈지칼은 뚜렷한 아방가르드적 대안을 제시하였다. 이 연주회에서는 쇤베르크, 베베른, 베르크와 같은 전쟁 이전의 무조 음악 레퍼토리의 주요 작품들과, 물론 불레즈 자신을 포함한 젊은 세대 작곡가들의 신작들이 함께 연주되었다. 이러한 작품들은 음렬(tone row, series)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조성을 음높이의 순열(permutation)로, 중심성과 기능적 위계를 평균율의 열두 음을 동등하게 취급하는 원리로, 익숙하고 안정된 음악적 언어를 예측할 수 없는 리듬과 형식으로 대체하는 원리였다. 음렬주의 기법은 불레즈, 앙드레 부쿠레슈리예프(Boucourechliev), 장 바라케, 앙리 푸쇠르(Pousseur)의 저술을 통해 기술적으로 정교하게 발전하였으며, 한편으로는 도멘 뮈지칼 연주회의 단골 참석자였던 초현실주의 시인 르네 샤르가 다음과 같이 장중한 비유를 통해 이를 표현하기도 했다. "오늘날의 음렬음악은 인간이라는 수수께끼가 새로운 방식으로 융합되는 지점의, 내적이면서도 외적인, 움직이고 잔혹하며 진실한 거울이다."
1954년 1월 13일 열린 도멘 뮈지칼의 첫 번째 연주회에서 연주된 레퍼토리는 이미 불레즈가 이 새로운 연주 단체를 위해 설정한 사명의 일부를 반영하고 있었으며, 더 나아가 전후 음악 활동 전반에 대해 그가 품고 있던 비전을 보여준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음악의 헌정(Musical Offering)》
루이지 노노: 《Polifonica, monodia, ritmica》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 《Kontrapunkte》
안톤 베베른: 《협주곡(Op. 24)》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Renard》
이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은 의도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즉, 전쟁 이전 아방가르드의 서로 대립하던 미학적 경향(베베른과 스트라빈스키)을 연결하고자 했으며, 아직 서른 살도 되지 않은 젊은 작곡가들(슈토크하우젠과 노노)의 새로운 목소리를 소개하고자 했고, 전쟁 이전의 12음기법 걸작들을 옹호하고자 했으며(전후 음렬주의 발전의 핵심 작품인 베베른의 《칸타타 제2번 Op. 31》(1941–43)은 1956년 도멘 뮈지칼에서 초연되었다. 제3장 참조), 동시에 바흐의 다성음악적 순수성과도 연결되고자 했다. 마치 고도로 반음계적인 《음악의 헌정》에서 순열적(permutational) 아름다움을 구현한 바흐가 음렬주의의 대부(godfather)인 것처럼 말이다. (의미심장하게도, 불레즈가 처음 발표한 글 가운데 하나의 제목은 「장 세바스티앵 바흐의 순간(Moment de Jean-Sébastien Bach)」(1950)이었다.) 도멘 뮈지칼 연주회의 청중은 지식인과 예술가들뿐 아니라 사회 상류층의 저명한 인사들까지 함께 구성되어 있었다. 심지어 스트라빈스키식 신고전주의의 대표적 옹호자였던 나디아 불랑제와, 전간기(戰間期)를 대표하는 '6인조(Groupe des Six)'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장 콕토 같은, 얼핏 보면 이 연주회와는 어울리지 않을 법한 인물들까지도 첫 번째 연주회에 참석하였다.
결국 이 연주 단체의 역사적 중요성은 상당 부분 상징적인 것이었다. 지식인들, '세련된(chic)' 파리지앵들, 그리고 정부 관료들이 참석한 이 연주회는, 프랑수아 포르실(François Porcile)이 지적했듯이, 전쟁 이전의 귀족 후원 체제(폴리냐크 공주(Princesse de Polignac)와 노아유 백작부인(Comtesse de Noailles) 같은 후원자들)와 살롱 문화, 그리고 조르주 퐁피두(1969–74) 대통령 시기에 본격화되고 특히 사회당의 프랑수아 미테랑(1981–95) 정부 아래 대규모 국가 지원 문화 프로젝트를 통해 완성에 이르게 되는 전후 국가 주도의 문화 개입 체제 사이를 잇는 과도기적 단계였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 도멘 뮈지칼 연주회 이후 약 10년 동안 도멘이라는 기관 자체와 '음렬(series)'이라는 개념, 그리고 불레즈라는 인물을 둘러싼 신비화(mystique)가 형성되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음악적 평범함으로부터의, 거의 종말론적이라고 할 만큼 임박한 구원을 예고하기까지 했으며(암묵적으로는 전쟁 중 비시 정권 아래에서 프랑스 음악 기관들 상당수가 안고 있었던 협력주의(collaborationist)의 오명으로부터의 구원까지도 의미했다). 러시아 출신 음악학자이자 파리 사교계의 명사였던 피에르 수브친스키(Pierre Souvtchinsky)는, 훗날 불레즈를 자신의 후원자인 테즈나 부인(Madame Tézenas)에게 이어지는 상류층 사교계에 소개해 준 인물이었는데, 1954년이라는 이 중요한 전환의 해에 자신의 젊은 제자(이름은 밝히지 않았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며 메시아적 확신을 숨기지 않았다.
"오늘날 살아 있는 음악이 돌이킬 수 없이 착수하고 있는 개념과 언어의 개혁, 그리고 재구성에는 분명 선구자들이 있었고, 그것을 주의 깊고도 유익하게 해명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 운동, 이 새로운 세대의 결집이 자기 자신과 자신의 역사적 가치를 결정적으로 자각하기 위해서는, 우리를 끊임없이 뒤흔들고 예기치 않게 등장한, 운명적으로 선택된 한 음악가의 출현을 기다려야 했다. 왜냐하면 언제나 하나의 사건, 곧 한 명의 창조자가 자신의 등장과 존재, 자신의 재능과 판단의 천명을 통해 가까운 것과 먼 것 모두를 새롭게, 그리고 갑작스레 더욱 선명하게 보이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1950년대의 대표작이자 오늘날에도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주인 없는 망치(Le Marteau sans maître)》(1952–55)에서, 불레즈는 초현실주의 시의 설득력 있는 음악적 대응물을 창조해냈다. 여기서 사용된 시는 르네 샤르(René Char)의 작품으로, 불레즈는 이미 두 개의 초기 칸타타인 《물의 태양(Le Soleil des eaux)》(1948, 1958, 1965)과 《혼인의 얼굴(Le Visage nuptial)》(1946; 1948/1951–53, 1986–89)에서 그의 시에 곡을 붙인 바 있으며, 이를 통해 이전에 앙드레 수리(André Souris)의 작품들에서 시도된 적이 있었던 일종의 '음악적 초현실주의'를 구현하였다. 《주인 없는 망치》에서 이국적인 편성은(일본, 발리, 중앙아프리카의 전통 음악을 환기하도록 의도적으로 선택된 것으로, 기타, 마림바, 비올라, 알토 플루트, 비브라폰, 타악기 등 모두 중음역을 사용하는 악기들로 이루어져 있다) 불레즈 특유의 악기 편성을 잘 보여준다. 그는 공명이 오래 지속되는 악기, 즉 한 번 음을 내고 나면 연주자가 그 소리를 더 이상 직접 통제할 수 없는 악기들을 선호했는데(《주인 없는 망치》에서는 플루트와 비올라를 제외한 모든 악기가 이에 해당한다). 이 작품은 또한 슈프레히슈티메(Sprechstimme)와 허밍(humming)을 포함한 독창적인 성악 발성 기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이러한 다양한 발성 방식에 대한 탐구는 이후 《Pli selon pli》(1957–62; 1983; 1990)와 《cummings ist der Dichter》(1970; 1986) 같은 작품들에서도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관심사가 된다. 더 나아가 《주인 없는 망치》의 구조는 서로 맞물리는 세 개의 순환(cycle)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이른바 '열린 작품(open work)'을 포함한 비선형적 형식에 대한 불레즈의 평생에 걸친 관심을 예고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주인 없는 망치》의 모든 악장에 스며 있는 연극성은, 불레즈가 1946년부터 약 10년 동안 20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극단 가운데 하나였던 르노-바로 극단(Compagnie Renaud-Barrault)의 음악감독으로 활동하며, 무대음악을 작곡하고 지휘했던 경험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은 결과임이 분명하다.
불레즈 작품의 또 다른 지속적인 특징은 철저하게 미완성된 상태를 유지하려는 성격이며, 이러한 성격은 그의 작품들을 하나의 '진행 중인 작업(work-in-progress)'으로 만든다. 이러한 특징은 《Répons》(1980–82– ), 《피아노 소나타 제3번》(1955–57; 1963), 《...explosante-fixe...》(1991–93)를 비롯한 많은 작품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공통적으로 나타나며, 그 배경에는 조이스의 『피네건의 경야(Finnegan's Wake)』에 대한 불레즈의 깊은 관심과 말라르메의 시학이 자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들은 또 다른 의미에서도 완결을 거부한다. 이른바 '열린(open)' 또는 '가변적(mobile)' 작품에서는 연주자가 여러 가능한 경로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여 작품을 진행할 수 있도록 허용되는데, 이러한 작곡 모델은 1960년대 프랑스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많은 작곡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불레즈의 작품들은 서로 일정한 '유전적' 유사성을 공유하는 군집(clusters)을 형성한다. 하나의 '모체 작품(mother work)'—예를 들어 여러 개의 작은 파생 작품(satellite works)의 원천이 된 《...explosante-fixe...》와 같은 작품—은 다양한 규모의 새로운 작품들을 계속해서 낳는다.
또 다른 작품들은 여러 가지 판본으로 존재하며, 때로는 수년, 심지어 수십 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수정되기도 한다. 《혼인의 얼굴(Le Visage nuptial)》, 《Pli selon pli》, 《Répons》의 연속적인 개정판들은 작품이 언제나 잠재적으로는 미완성 상태에 머물러 있음을 잘 보여준다. 반면 어떤 작품들은 미완성인 것으로 남아 있지만, 이후 더 이상의 확장이나 수정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피아노 소나타 제3번》은 1957년 초연 당시 불레즈가 다섯 개 악장을 모두 연주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출판된 것은 다섯 악장 가운데 두 악장뿐이다. 작품들 사이의 또 다른 연결 방식은 한 작품의 재료를 다른 작품으로 차용하는 데서 나타난다. 예를 들어 피아노를 위한 《Notations》(1945) 가운데 두 곡은 관현악으로 편곡되어 《Pli selon pli》의 제2악장인 「Première improvisation sur Mallarmé」에 삽입되었다(다음 장의 예제 2.1 참조). 마지막으로, 어떤 작품들은 아예 작품 목록(catalogue)에서 제외되기도 한다. 그 예가 《Poésie pour pouvoir》(1958)인데, 이 작품은 초연 이후 오케스트라와 테이프 파트 사이의 조화가 충분하지 못하다고 작곡가 자신이 판단하였으며, 그 녹음은 단지 기록 보존을 위한 '자료(documents)' 이상의 것으로는 인정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