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L’artisanat furieux(1946-1955)

격렬한 장인정신

Alain Galliari, dir., Catalogue de l’œuvre (Paris: Éditions de la Philharmonie, 2025), 62-69

이 장에서 다루는 시기의 불레즈 작품 전개를 어떻게 규정해야 할지 적절한 용어를 찾기는 쉽지 않다. 엄격한, 타협하지 않는, 급진적인…. 어쨌든 이러한 눈부신 발전은 쇤베르크가 열어 놓은 길, 곧 12음의 계열적 조직(serial organization)이라는 음악 언어의 개혁이라는 필요성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그의 세대의 많은 음악가들은 그 길을 따랐으며, 흔히 불레즈가 작품마다 스스로 개척해 나간 길보다 더 신중한 길을 걸었다. 이러한 발전은 무엇보다도 젊은 불레즈가 대부분의 12음주의자들이 쇤베르크의 계열을 기계적으로 사용하는 방식에 대해 내린 비판에서도 설명될 수 있다. 그의 눈에 그것은 음악을 불모의 아카데미즘으로 이끌고 있었다. 안톤 베베른의 작품은 당시 젊은 음악가를 움직이고 있던 사유의 출발점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베베른을 넘어서는 것, 다시 말해 그의 12음 사용 방식을 철저히 검토하여 계열주의의 잠재력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이 필요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불레즈는 “쇤베르크는 죽었다!”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베베른이 그에게 “문턱”[2], 곧 모험의 출발점이었다면, 그 역시도 “얼굴을 지워 버려야”[3] 했고, 그의 유산 또한 동일한 가차 없는 비판에 부쳐야만 베베른이 도달하지 못했던 해방의 지점에 이를 수 있었다. 이러한 계획은 훗날 “일반화된 총렬주의(sérialisme généralisé)”라고 불리게 된 것, 즉 불레즈 자신은 오히려 “초(超)계열주의(hyper-sérialisme)”라고 부른 것을 낳았으며, 바로 이 시기의 작품들을 특징짓는다. 이 결정적인 시기의 사유는 그가 동시에 발표한 여러 편의 에세이와 논쟁적인 글들 속에서도 그대로 드러나는데[4], 그것들은 그를 움직인 엄격한 요구를 증언한다.

쇤베르크식 12음의 시적 사용인 《12개의 노타시옹(Douze Notations)》[22]에서 출발한 불레즈의 여정은, 빈 악파의 유산을 비판적으로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과정을 거치며 5년 동안 계속된다. 그 과정은 《플루트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티네(Sonatine pour flûte et piano)》[24], 두 개의 《피아노 소나타(Sonates pour piano)》[25, 29], 《물의 태양(Le Soleil des eaux)》[30, 34], 두 가지 판본의 《혼인의 얼굴(Le Visage nuptial)》[27, 33]을 지나, 1948~1949년에 작곡된 《현악4중주(Quatuor à cordes)》[32]에 이르는데, 이 작품은 추상성을 향한 최초의 돌파구였다. 몇 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놀랄 만큼 생산적인 작업을 통해―그의 악보가 보여 주는 새로움과 그것을 관통하는 탐구의 야심을 기준으로 본다면―아직 스물다섯 살도 되지 않은 젊은 불레즈는 12음 작곡법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었으며, 그것을 최초의 비판적 종합으로 발전시켰다.

비평의 시기를 거친 그는 모든 것을 다시 처음부터 뒤엎을 준비가 되어 있다. 《현악4중주》 이후 그가 몰두한 금욕적 탐구는 겨우 4~5년 동안만 지속되는데, 《타악기를 위한 연습곡(Essais pour percussion)》[35], 《현악4중주를 위한 책(Livre pour quatuor)》[44], 그리고 장 미트리(Jean Mitry)의 영화 기계적 교향곡(Symphonie mécanique)을 위해 만든 구체음악[48]이 이 시기에 속한다. 이러한 작업의 중심에는 《폴리포니 X(Polyphonie X)》[38]와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구조 제1권(Premier Livre de Structures)》[37]이 있다. 그러나 《책(Livre)》과 함께 불레즈는 결코 중단하지 않을 하나의 탐구를 시작한다. 그것은 개방성과 유동성을 통한 유연성의 탐구이다. 점묘주의적 필법과 건조하고 단호한 문체로 특징지어지는 이 척박한 시기를 거치면서도 그는 또한 하나의 찬란한 결실을 얻게 된다. 바로 《주인 없는 망치(Le Marteau sans maître)》[41]이다. 이 작품은 사유의 엄격함이 음향적 시와 자유로운 상상력의 변덕과 결합된 대표작으로, 그의 미래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마련하였다. 불레즈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주인 없는 망치》는 “터널을 빠져나온 것”[5]을 의미했으며, 그에게 유럽 음악 아방가르드의 좁은 범위를 넘어서는 명성을 안겨 주었다.

이 작품들은 그 급진성으로 인해 “작곡의 영도(零度)의 경험(l'expérience du degré zéro de l'écriture)”을 시도하였으며, 역설적으로 작곡가의 명성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그 명성은 상당 부분 부정적인 방식으로 형성되었고, 이후에도 그를 따라다니게 될 냉혹함과 교조주의라는 낙인을 씌우게 되었다. 불레즈 자신도 훗날 이 엄격성의 시기를 비판하게 되지만, 그것이 반드시 필요했던 시기였다고 판단한다. “나는 당시 작곡된 대부분의 작품들에서 정신적인 관점에서 만족스러운 계획 외의 다른 것은 느끼지 못한다. 정신적 계획, 추상적 계획, 지적 만족, 심지어 조작 자체에서 오는 만족과 결과 사이에는 일종의 이분법이 존재한다. […] 그러나 나는 그러한 이론적 금욕주의와 때로는 극도로 힘들고 고된 작업이 나에게 많은 것을 발견하게 해 주었다는 사실 또한 부정하지 않는다.”[7]

이 10년은 작곡가의 여정에서 결정적인 시기였다. 그는 스무 살에서 서른 살 사이였으며, 동시에 바로(Barrault)의 시대이기도 했다. 1946년 마르트노 전자악기(ondes Martenot)를 연주하기 위해 르노-바로 극단(Compagnie Renaud-Barrault)에 들어간 불레즈는 1956년까지 그곳의 “음악감독(directeur de la musique)”이 된다. 이 활동을 위해 쓰인 세 개의 악보[42, 46, 49]는 이 장에서 다루는, 그가 당시 몰두했던 정교한 사변적 탐구와 서로 맞물려 있다.

더 나아가 이러한 동행이 그의 이후 경력에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녔다는 사실도 잘 알려져 있다. 바로와 그의 주변 인물들을 통해 불레즈는 작가들, 예술가들, 지식인들, 사회 저명인사들, 정책 결정자들, 후원자들을 만나게 된다. 앙리 미쇼(Henri Michaux), 앙드레 마송(André Masson), 마리아 엘레나 비에이라 다 시우바(Maria Helena Vieira da Silva), 피에르 수브친스키(Pierre Souvtchinsky), 앙드레 수리(André Souris), 쉬잔 테제나(Suzanne Tézenas), 그리고 그를 정치·행정계 인사들에게 소개해 준 앙드레 뒤부아(André Dubois) 주지사를 들 수 있다. 여기에 그의 경력에서 특별한 역할을 했던 음악가들(특히 조르주 오리크(Georges Auric))은 말할 것도 없다. 또한 극장에서의 작업은 그를 음악감독과 매일 접촉하게 했으며, 부에노스아이레스, 카라카스, 리우데자네이루, 몬트리올, 뉴욕, 그리고 유럽에서는 브뤼셀, 런던, 밀라노, 취리히, 암스테르담, 헤이그까지 이끌었다. 또한 바로 덕분에 이 10년의 끝무렵에는 도멘 뮈지칼(Domaine musical) 연주회도 싹트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극단에서의 활동을 통해 더 이상 편곡자가 아니라 작곡가의 자격으로, 1955년 《오레스테이아(L'Orestie)》[47] 3부작 작업에 참여하게 된다. 이 작품을 위해 불레즈는 어떠한 타협도 없는 무대음악을 작곡했으며, 그 일부는 이후의 여러 작품을 위한 원천이 될 것이다.

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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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rre Boulez's Musical Language and Compositional Aesthetic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