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IALISM AND SURREALISM: BOULEZ’S INSTRUMENTAL MUSIC 1946–8 pp. 98-103.
Potter, Caroline. Pierre Boulez: Organised Delirium. Woodbridge: The Boydell Press, 2025.
불레즈, 라이보비츠 그리고 미학적 항의
젊은 불레즈에게 마지막으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제2빈악파였다. 쇤베르크, 베르크, 베베른은 1940년대 중반 프랑스에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으며, 이후 불레즈와 의견이 갈라지게 되기는 했지만, 르네 라이보비츠(René Leibowitz, 1913–72)는 불레즈에게 이 작곡가들을 소개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불레즈에 관한 대부분의 문헌은 젊은 작곡가였던 그에게 베베른의 음렬 언어가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강조하지만, 그의 가장 초기 작품들에서는 오히려 쇤베르크가 더 강한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라이보비츠의 한 연주회 프로그램 북에 처음 실렸던 미셸 레리스(Michel Leiris)의 쇤베르크에 관한 글은 다음과 같은 말로 끝나는데, 이 말은 불레즈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동시대 사람들이 제시했던 해결책을 훨씬 뛰어넘어—그들은 이성, 유머, 혹은 잔혹성에 심취해 있었다—아르놀트 쇤베르크는 이 과정에 천재적으로 참여한다. 그는 자신이 노예가 되었다고 선언한 이 ‘내적 강제’에 자신을 완전히 내맡기면서, 다른 어떤 지점보다도 더 가파르고 더 위태로운 곳, 즉 톱니처럼 날카로운 이빨이 솟아 있는 현기증의 바로 정점에 음악을 올려놓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1945년 2월 이전까지 불레즈가 알고 있던 쇤베르크는 극도로 감정적이고 표현주의적인 쇤베르크였다. 그러다 1945년 2월, 그는 현대음악을 지지하던 젊은이 클로드 알펜(Claude Halphen)의 집에서 열린 연주회에 참석했다. 불레즈는 앙투안 골레아(Antoine Goléa)에게 당시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것이 내가 음렬음악을 처음 접한 순간이었다. 막스 도이치(Max Deutsch)의 노래들과 라이보비츠의 젊은 제자였던 앙드레 카사노바(André Casanova)의 작품 한 곡이 연주되었고, 라이보비츠가 쇤베르크의 《관악 5중주》를 지휘했다. 그것은 내게 하나의 계시와도 같았다. 나는 이 음악을 알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을 느꼈고, 무엇보다도 우선 그것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배우고 싶었다.’
이 경험을 계기로 불레즈는 1945년 봄부터 1946년 가을까지 라이보비츠의 개인 수업에 참석했다. 그곳에는 니그(Nigg), 그리모(Grimaud), 로리오(Loriod)를 비롯하여 메시앙에게 배웠던 다른 학생들도 함께 있었다. 니그는 장 부아뱅(Jean Boivin)에게 자신이 메시앙의 학생들이 라이보비츠에게 배우도록 ‘이탈(defection)’을 주도했다고 말했다. 그는 라이보비츠를 그의 첫 프랑스인 제자인 앙드레 카사노바(1919–2009)를 통해 알게 되었다.
1945년 2월에는 이 학생 집단과 관련된 가장 악명 높은 사건 가운데 하나도 벌어졌다. 스트라빈스키의 《Danses concertantes》(1941–42)가 1945년 2월 27일 Société Privée de Musique de Chambre에 의해 파리에서 초연되었는데, 불레즈가 이끄는 메시앙의 학생 몇 명은 이 작품의 신고전주의적 양식을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여겨 이에 항의했다. 그들은 소리를 지르고 경찰 호루라기를 불었다. 같은 프로그램에서는 니그의 《피아노, 타악기와 관악기를 위한 콘체르티노》(1944)가 초연되었고, 니그는 학생들의 견해를 대중에게 알리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45년 4월 14일, 니그는 프랑스 해방운동의 기관지를 자처했던 신문 『Combat』에 「La Querelle Strawinsky [sic]」라는 글을 발표했다. 학생들의 태도에 대한 비판에 대응하면서 니그는 사실관계를 바로잡으려 했다.
‘사방의 비평가들에게 공격받고 있는 이 ‘젊은 바보들’에게는, 모든 예술적 시도가 반드시 성공에 이르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절실하게 체감된 불안에서 비롯된 것이어야 한다. 내가 아는 한, 그들이 한 일이라고는 예술적 창작의 윤리에 관한 몇 가지 근본 원칙을 제시한 것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를 불러일으켰고, 그 결과 그들은 곧바로 ‘비순응주의를 하나의 규범처럼 따르는 자들’, ‘새로운 아카데미주의자들’, 혹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현대적이려고 하는 자들’이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니그가 자신의 글에서 설명하듯이, 이들이 신고전주의에 반대한 것은 그것을 퇴폐적이고 평범하며, 당대가 제기하는 문제들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하는 음악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메시앙은 이들의 항의 행동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신고전주의 작곡가들에 대한 반감만큼은 제자들과 공유했다. 1945년 10월 그는 이 작곡가들이(신고전주의 작곡가들: 역주) “자신들의 작품에 현대적인 소스를 끼얹어, 청중으로 하여금 ‘현대’ 음악을 듣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고 썼다. 니그는 글을 이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들은 어떤 종류의 음악이—무조음악이든 아니든—여러 가지 결합을 지나치게 탐구한 나머지 지나치게 ‘지적’이며, 그 때문에 근본적으로 자발성을 배제한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베토벤의] 《대푸가》, [바흐의] 《푸가의 기법》, [버르토크의] 《현악기, 타악기와 첼레스타를 위한 음악》, 혹은 [쇤베르크의] 《기대》 같은 작품을 두고, 지적인 구성 때문에 음악성이 훼손되었거나 감정이 결여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이러한 비판은 이후 불레즈의 음악이 어떻게 받아들여지게 될지를 생각하면 놀라울 정도로 선견지명이 있어 보인다. 치밀하게 구성된 음악은 감정적인 힘을 가질 수 없다는 평가는 이후 불레즈의 음악을 따라다니는 흔한 비판이 되었고, 이 책은 바로 그런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러나 스트라빈스키의 《Danses concertantes》에 대한 항의는 불레즈와 그의 동료들이 라이보비츠에게 배우기 이전에 일어난 일이었고, 무조성이나 음렬주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 중요하다. 레슬리 스프라우트(Leslie Sprout)가 정확히 강조하듯, “1945년의 스트라빈스키 반대 시위는 하나의 특정한 음악양식을 결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젊은 프랑스 작곡가들이 전후 프랑스 음악의 미래를 형성하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자 했던 열망에 관한 것이었다. 비록 그들 자신도 그 미래가 어떤 양식적 형태를 취하게 될지는 여전히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아마도 니그의 글에서 끌어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음악의 윤리적 차원을 강조했다는 점, 즉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의 불안한 시대에 음악이 응답해야 한다는 그의 깊은 신념일 것이다. 불레즈 역시 음악이 진지한 목적을 가져야 한다는 니그의 믿음을 공유했지만, 두 사람이 그 믿음을 실제로 구현하는 방식은 뚜렷하게 갈라졌다. 불레즈와 달리 니그는 프랑스 공산당(Parti Communiste de France)에서 정치적으로 활동했으며, 1940년대 후반 그의 양식적 변화는 음악이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점 강해지는 믿음을 반영했다. 그리고 파리에서 젊고 논쟁적인 음악 논객으로서 니그가 차지했던 역할이 곧 불레즈에게 넘어갔듯이, 프랑스에서 가장 두드러진 젊은 작곡가라는 그의 위치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불레즈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러시아계 유대인 혈통으로 폴란드에서 태어난 르네 라이보비츠는 가족과 함께 베를린으로 이주했고, 이후 1926년경 파리로 옮겨왔다. 라이보비츠는 베를린에서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음악교육을 시작했다. 일부 자료에서는 그가 이후 쇤베르크나 베베른에게 배웠다고 하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 그는 1930년대 초 독일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에리히 이토르 칸(Erich Itor Kahn)을 통해 12음 음악을 접한 것으로 보이며, 작곡가로서 이 양식을 받아들였다. 파리에서 그는 예술가와 지식인들의 사회에 들어가 테오도어 아도르노, 조르주 바타유,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등의 작가들과 친분을 맺었고, 파블로 피카소와 앙드레 마송 등의 예술가들과도 교류했다. 또한 장폴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가 편집하던 저명한 문예지 『Les Temps modernes』에도 글을 썼다.
라이보비츠는 자신을 주로 작곡가로 여겼지만, 오늘날에는 지휘자이자 교육자로 가장 잘 기억된다. 1945년 12월 5일 열린 한 연주회의 프로그램에는 그의 개인 제자 몇 명의 이름과 함께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그림 3.1). 이 연주회에서 라이보비츠는 프랑스 국립 오케스트라의 연주자들을 지휘하여 자신의 《Chamber Concerto》 op. 18, 쇤베르크의 《Chamber Symphony》 op. 9, 그리고 쇤베르크의 《Herzgewächse》(Foliage of the heart) op. 20과 베베른의 《Symphony》 op. 21의 프랑스 초연을 연주했다. 불레즈는 메테를링크의 시에 곡을 붙여 콜로라투라 소프라노, 하프, 첼레스타, 하모니움을 위해 작곡된 《Herzgewächse》(1911)에서 하모니움을 연주했으며, 그리모는 메시앙의 《Trois petites liturgies》 초연에서 맡았던 첼레스타 연주자의 역할을 다시 맡았다. 1945년 11월 30일자 『Combat』에는 이 연주회의 예고 기사가 실렸는데, 여기서 라이보비츠는 “파리에서 쇤베르크 악파를 대표하는 핵심 인물”로 묘사되었다. 같은 예고 기사에서는 9월 15일 사망한 베베른이 “나치에 의해 암살되었다”고 언급되었다.
라이보비츠는 제2빈악파에 관한 여러 권의 책을 출판했는데, 특히 『Schoenberg et son école』(1947)과 『Introduction à la musique de douze sons』(1949)이 대표적이다. 그의 사상은 긍정적인 의미와 부정적인 의미 모두에서 불레즈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라이보비츠의 수업에서 이들은 베베른의 《Symphony》 op. 21, 《Concerto for Nine Instruments》 op. 24, 《Piano Variations》 op. 27, 《String Quartet》 op. 28, 《Cantata No. 1》 op. 29, 《Variations for Orchestra》 op. 30 등의 작품을 공부했다. 이것들은 당시로서는 매우 최근에 쓰인 작품들이었으며, 《Variations》의 경우 1940년에 작곡된 작품이었다. 불레즈가 이 악보들을 직접 필사한 사본들은 현재 파울 자허 재단(Paul Sacher Stiftung)의 불레즈 컬렉션에 소장되어 있으며, 그중 일부에는 음렬이 작동하는 방식을 상세히 설명하는 주석도 들어 있다. 데이비드 월터스(David Walters)는 라이보비츠의 친구였던 아도르노가 저술가로서의 라이보비츠에게 미친 영향을 지적하면서, 불레즈의 “변증법적 접근 방식은 라이보비츠의 그것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고 말한다. 실제로 “1948년에서 1951년 사이에 발표된 불레즈의 최초 네 편의 글은 모두 어떤 식으로든 라이보비츠의 사상을 논한다.” 다만 일반적으로는 자신의 옛 스승을 공격하는 방식으로 그렇게 한다.
실제로 불레즈가 12음 작곡법을 발견한 것은 그의 음악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지만, 스승으로서의 라이보비츠에 대한 그의 평가는 급속히 나빠졌으며 이후 결코 회복되지 않았다. 불레즈는 쇤베르크의 등장을 역사적 필연으로 보는 라이보비츠의 견해를 맹렬히 비판했으며, 라이보비츠의 교수 방식을 “최악의 아카데미주의”라고, 그의 쇤베르크 분석을 “산술적인 카운트다운”이라고 여겼다. 이러한 견해에는 당시 파리 음악계에도 선례가 있었다. 이미 1939년 앙드레 셰프네르(André Schaeffner)는 라이보비츠의 독일 중심적인 음악사관과 스트라빈스키에 대한 이해 부족을 공개적으로 비판했으며, 불레즈가 처음 발표한 글 가운데 하나에서 라이보비츠를 강하게 비판한 것이 계기가 되어 셰프네르와 만나게 되었고, 셰프네르는 이후 그의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불레즈는 1947년 12월 17일 앙드레 수리(André Souris)에게 보낸 편지에서 라이보비츠에 대해 자신이 품고 있던 반감을 상당히 상세하게 설명했다.
내가 [라이보비츠를] 끈질기게, 그리고 상당히 강하게 공격한다면, 그것은 개인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다. […] 내 생각에 그는 분석적 설명에 일종의 독점권을 가지고 있으며, 적어도 자신의 관점에서는 그것이 그를 무함마드와 같은 지위로 끌어올린다고 생각한다. Insh-Allah. 그는 자신을 새로운 종교의 사도라고 여긴다. […] 그의 번거롭고 거추장스러운 용어법에 더해, 아이러니나 유머 감각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현재의 음악적 경향을 가장 열심히 좇으려는 사람들은 그를 경계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훌륭한 선전가가 아니다. 그의 서툴고 어리석은 포교 활동은 파국적인 결과를 낳는다(격렬한 반응이 아니라 지루함을 낳는다는 말이다). […] 자랑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순전히 기술적인 의미에서 그의 관점 가운데 일부가 완전히 터무니없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가운데 하나다.
불레즈는 라이보비츠에 대한 자신의 비판 때문에 대가를 치렀다. 지휘자였던 라이보비츠는 전후 몇 년 동안 현대음악 연주회를 조직하던 몇 안 되는 사람 가운데 하나였고, 특히 음렬음악의 옹호자로서 규모가 작았던 파리 현대음악계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 라이보비츠가 자신의 연주회에서 불레즈의 음악을 다루지 않았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라이보비츠가 1947년 1월 25일과 29일 파리에서 개최한 12음 음악 페스티벌에는 그의 프랑스 제자 앙드레 카사노바, 앙투안 뒤아멜(Antoine Duhamel), 세르주 니그(Serge Nigg), 영국 작곡가 엘리자베스 루티언스(Elisabeth Lutyens)와 험프리 설(Humphrey Searle), 그리고 벨기에의 앙드레 수리의 작품이 포함되었지만, 불레즈의 작품은 포함되지 않았다. 이 페스티벌의 프로그램은 파리 초현실주의 집단과의 직접적인 연관을 보여준다. 앙드레 마송의 초상이 프로그램을 장식했고, 이 장의 첫머리에서 인용된 미셸 레리스의 쇤베르크에 관한 글도 이곳에서 처음 발표되었다. 불레즈는 이 연주회에서 수리를 만나기를 바랐지만, 프랑수아 메이문(François Meïmoun)이 지적하듯 수리는 파리로 올 수 없었고, “불레즈는 그에게 이 행사에 대한 신랄한 비평을 보냈다.” 이 편지에서 불레즈는 뒤아멜과 카사노바의 작품을 “순전히 아카데믹한 클리셰”라고 조롱했고, 니그를 “바그너화하고 있다”고 비꼬았으며, 쇤베르크의 《Ode to Napoleon》의 음렬에 기초한 라이보비츠 자신의 《Overture》를 “거장의 생일을 위한 진정한 크림 타르트”라고 평했다(이것이 칭찬으로 의도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불레즈가 사적으로 동료들에게 비판적이었다면, 공개적으로 발표한 글에서는 그보다도 더욱 신랄했다. 1948년 초 『Polyphonie』에 실린 「Incidences actuelles de Berg」에서 그는 베르크의 음악이 “바그너로의 불길한 회귀의 출발점”이라고 주장하며 이렇게 썼다. “베르크가 뒤아멜과 카사노바처럼 아무런 흥미도 없는 사람들을 자신의 뒤에 끌고 간다 해도, 그것은 우리에게는 정말 아무런 의미도 없으며 전적으로 무관한 일이다. 시체에는 언제나 벌레가 번성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