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r Pierre… : Correspondance 1947–1985

Boulez et Souvtchinsky : de près, de loin, une indéfectible amitié, pp. 15-19.

Boulez, Pierre, and Pierre Souvtchinsky. Cher Pierre… : Correspondance 1947–1985. Edited by Gabriela Elgarrista and Philippe Albèra. Paris and Geneva: Éditions de la Philharmonie de Paris and Contrechamps, 2025.

II.

수브친스키와의 서신 교환을 통해 우리는 불레즈가 활동을 시작한 초기부터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를 추적할 수 있다. 특히 그의 내면에서 아주 일찍부터 서로 긴밀하게 얽혀 있던 네 가지 영역, 즉 작곡, 연주와 해석, 미학적 사유, 그리고 제도적 활동에서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불레즈는 같은 시기에 케이지, 푸쇠르, 슈토크하우젠과 나누었던 것과는 달리, 수브친스키와는 작곡 기법에 관한 문제를 논의하지 않는다. 이들의 대화는 훨씬 다양하고 보다 일반적인 성격을 띠며, 바로 여기에 이 서신 교환의 가치가 있다. 두 사람 모두 사물과 현상에 대해 단호한 판단을 내리는데, 그러한 판단은 그들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드러낸다. 예를 들어 메시앙의 《세 개의 탈라》(Trois Talas)를 듣고 불레즈가 보인 반응(서신 6)은 두 사람 사이에 다툼을 일으켰으며, 동시에 그의 판단을 뒷받침하는 윤리적·도덕적·예술적 토대를 드러낸다. 그는 쇤베르크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몹시 싫어했으며, 베르크의 《세 개의 관현악곡》 작품 6에 대해서도 “끔찍하게 시대에 뒤떨어져 있다”(서신 39)고 평가했다. 그러나 훗날 그는 이 작품들을 탁월한 통찰력으로 해석하는 지휘자가 된다. 이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작곡가들의 경우까지 언급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두드러지는 변화다. 그는 과거 동료였던 세르주 니그(Serge Nigg)와 같은 ‘참여적’ 음악가들이나 12음기법 관련 학술회의에 참석하는 음악가들에게 오직 냉소적인 반응만을 보였다. 그는 곧 피에르 셰페르(Pierre Schaeffer)와도 충돌하게 된다. 셰페르와는 쾰른에서 마이어에플러를 함께 만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케이지에 대해서도 얼마나 환멸을 느끼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불레즈는 뉴욕에서 케이지를 다시 만났을 때만 해도 열광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그는 수브친스키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그에게는 작곡에 대한 감각이 근본적으로 결여되어 있습니다. […] 그래서 우연성이나 외적인 효과 같은 속임수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피아노 뚜껑을 두드리거나, 나무를 치거나, 하모니 테이블을 두드리는 식의 효과 말입니다.” (서신 40) 같은 편지에서 그는 바레즈와의 만남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바레즈는 자신의 악보를 불레즈에게 읽어보라고 건네주었다. “……우리끼리 하는 말이지만, 얼마나 실망스러웠는지 모릅니다. 그는 너무나 정직한 사람이어서 그에게 어떤 것을 인정하도록 설득하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불가능합니다. 그에게는 무언가 고집스럽고 미완성된 면이 있어서, 제가 그 작업에 전혀 참여할 수 없게 만듭니다. 그에게는 모든 것을 아직 미분화된 상태에 머물게 하는, 어떤 예리함과 통찰력의 재능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서신 40) 이후 바레즈가 《데제르》(Déserts)의 테이프를 들려주었을 때, 불레즈는 그에게 “끔찍한 인상”을 받았다고 말한다(서신 185). 1959년 다름슈타트에서 노노와 슈토크하우젠이 진행한 작곡 강좌의 내용에 대해서도 그는 “경악했다”고 표현한다. “어떻게 그토록 철저하게, 그리고 그토록 빨리 자신의 젊은 시절과 모든 제약에 대한 혐오를 잊어버릴 수 있는가?” 그리고 그는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는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인다. “나는 내 안에서 진정으로, 모든 ‘안주’에 맞서는 고갈되지 않는 반항의 힘을 느낍니다.” 그는 수브친스키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나는 이 폐쇄적인 환경[다름슈타트의 환경]이 두렵습니다.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걸까요?” 이에 수브친스키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그들과 격렬하게 논쟁하십시오. 그러나 그들과의 관계를 끊지는 마십시오. 어쨌든 그곳은 당신의 젊은 시절이 이어지고 있는 곳이니까요……” (서신 145, 148)

우리는 여기서 수브친스키가 불레즈의 반항적인 정신에 매료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그 반항의 격렬함은 높은 수준의 예술적 요구, 순수성과 절대성에 대한 열망에서 비롯되었으며, 예외적인 재능과 조숙한 명석함에 결부되어 있었다. 동시에 불레즈가 왜 자신보다 시야가 넓은 인물에게 속내를 털어놓을 필요를 느꼈는지도 이해할 수 있다. 수브친스키는 불레즈의 지나친 열정을 누그러뜨리고 때로는 그에게 반대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순수하게 작곡 기술에 관한 문제들과 연결되어 있는 미학적·철학적 측면까지 자각하도록 도울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러한 균형은 두 사람의 관계가 지속되는 내내 유지되었다.

1946년, 불레즈는 아르튀르 오네게르의 추천으로 르노–바로 극단(Compagnie Renaud-Barrault)에 합류한다. 그는 오네게르의 아내에게 대위법을 배운 적이 있었다. 불레즈는 다소 거창하게도 이 극단의 음악감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편지에서 무대음악을 연주할 때 자신이 구상한 음악적 아이디어가 만족스럽게 구현되도록 하기 위해 기울였던 노력을 언급한다. 특히 극단이 세 차례 남아메리카를 순회공연했을 때의 경험이 그러했다. 1956년 베네수엘라 순회공연 중, 그는 처음으로 교향악단을 지휘하게 된다. 이는 작가 알레호 카르펜티에르의 주선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프로그램에는 드뷔시의 《유희》(Jeux)와 《이베리아》(Iberia)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이 경험을 수브친스키에게 다음과 같이 전했다. “……저는 대규모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시험대에 오르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이제 커다란 의문 하나가 해소되어 안도하고 있습니다. 저는 큰 오케스트라도 어려움 없이 지휘할 수 있습니다. […] 이제 앞으로 들어오는 지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충분히 해낼 수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저는 이 일이 좋습니다.” 그가 좋아했던 것은 “대규모 오케스트라의 음향을 형성하고, 이 공간 속에서 하나의 작품을 재구성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서신 85) 이 경험은 그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당시 르노–바로 극단에서 맡고 있던 일은 점점 그에게 부담스러운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는 이미 1954년 7월, 앞선 순회공연 중에 작곡을 위한 시간을 지속적으로 확보할 수 없다는 불만을 토로했다. “가끔은 오직 작업만을 위해 석 달 정도의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마침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텐데요.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때로는 낙담할 것 같은 기분마저 듭니다. 그리고 이제 저는 연극과 그 때문에 낭비되는 시간에 충분히 지쳤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무언가를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가을에 다시 이 문제를 이야기하지요. 하지만 무엇을 해야 할까요?” (서신 66) 이후에 벌어진 일들을 생각하면, 수브친스키가 이 편지에 어떻게 답했는지 알고 싶어진다. 서신을 통해 우리는 1954년 바로가 불레즈에게 오케스트라 지휘를 권유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서신 57). 작곡할 시간이 부족하다는 문제는 이후에도 불레즈에게 끊임없이 반복되는 고민이 된다.

1957년 《혼례의 얼굴》(Le Visage nuptial)이 초연된 이후, 불레즈는 본격적으로 오케스트라 지휘에 뛰어들게 된다. 원래 이 작품을 지휘할 예정이었던 헤르만 셰르헨이 마지막 순간에 불레즈에게 자신을 대신해 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다. 바덴바덴 방송국과 도나우에싱겐 음악제를 이끌던 하인리히 슈트로벨은 현대음악 레퍼토리로 명성이 높았던 남서독일방송 관현악단(Südwestfunk, SWF)과 함께 작업할 기회를 불레즈에게 제공한다. 이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는 한스 로스바우트(Hans Rosbaud)였으며, 그는 불레즈의 《폴리포니 X》(Polyphonie X)와 《주인 없는 망치》(Le Marteau sans maître)를 초연한 인물이었다. 불레즈는 이 지휘자의 작업을 존경했다. 로스바우트는 매우 폭넓은 레퍼토리를 지휘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러나 1959년 로스바우트가 중병에 걸리면서 불레즈에게 자신의 대역을 맡아 달라고 요청한다. 그중 하나가 엑상프로방스 음악제에서 예정되어 있던 벨기에 국립방송협회 관현악단(INR)과의 공연이었다. 로스바우트는 이 음악제의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불레즈는 이 공연에서 얻은 성공이 언론 보도를 통해 더욱 부풀려진 상황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면서, 자신이 왜 지휘를 맡았는지 수브친스키에게 설명한다. “첫째, 프랑스에서 외국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공연이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이 나라에서 제가 처음으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공연이었기 때문입니다. 셋째, 지휘대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던 해적 같은 녀석들에게 한 수 가르쳐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프로그램을 전부 외우느라 애를 썼습니다.[주 14] 베베른의 작품 6과 《보체크》의 발췌곡을 지휘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지만, 힌데미트의 협주곡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고역이었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프로그램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불레즈가 교향악단의 지휘자로서 자신이 수행할 수 있는 역할을 깨달았다는 점이다. 그것은 우선 연주자들에게 현대음악 작품의 가치를 납득시킨 뒤, 청중에게도 그 가치를 전달하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도 연주자들이 제 음악적 취향을 공유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그들은 베베른과 베르크에 열광했고, 힌데미트라는 영광스러운 이름 아래 등장한 그 뚱뚱하고 배불뚝이인 인물, ‘방귀를 뀌고 악취를 풍기는’ 그자의 굵직한 케이블 같은 음악에는 경멸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좋은 성과였습니다. 두 번째 성과는, 오케스트라가 저에게 브뤼셀의 상임지휘자가 되어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거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정말 아쉬웠습니다. 이 오케스트라는 제가 경험한 몇 안 되는, 그토록 깊은 호감과 뛰어난 재능을 함께 발견할 수 있었던 악단 중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서신 141)

바로 이러한 경험들이 불레즈를 필연적으로 오케스트라 지휘의 길로 이끌었다. 그러나 수브친스키는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에게 지휘 활동은 불레즈가 본래의 과제로부터 도피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불레즈 자신도 처음에는 지휘자로서의 경력을 르노–바로 극단에서 보낸 세월 이후 경제적·직업적 독립을 확보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지휘 활동은 동시에 자신의 예술적 출발점이었던 연극 경험의 연장선에도 있었다. 그것은 새로운 레퍼토리 해석을 제시하는 프로그램을 통해 창작자를 사회적 소통의 중심에 위치시키는 수단이기도 했다. 그가 장 빌라르에게 바친 헌사(부록 3)를 읽어보면, 불레즈가 어떤 정신으로 활동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불레즈는 바흐나 리스트가 과거에 수행했던 카펠마이스터(Kapellmeister)의 오래된 역할을 자기 방식으로 다시 창조하게 된다. 불레즈의 반낭만주의는 단순히 미학적 관념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자아를 중심에 놓고 내면의 감정 상태를 표현하는, 사회로부터 고립된 예술가의 형상과 자신을 동일시하기를 거부하는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불레즈가 존경하고 모범으로 삼았던 두 지휘자, 로제 데조르미에르와 한스 로스바우트는 모두 그의 음악을 최초로 지휘한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두 사람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났다. 장기적인 협업을 구상했던 빌란트 바그너 역시 마찬가지였다. 《혼례의 얼굴》 초연 이후 셰르헨과의 관계도 악화되었다(부록 5). 이러한 상황에서 불레즈는 자신만이, 혹은 적어도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수행할 수 있는 어떤 사명을 자신에게 부여받았다고 느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음악 속에 완전히 몰입하여 그 내부에서 음악에 직접 작용할 수 있다는 즐거움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된다. 베네수엘라 공연 이후 그가 지휘를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 이미 그러한 감정이 드러났다. 훗날 빈 필하모닉이나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와 작업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조지 셀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것은 보기 드문 즐거움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얼마나 경이로운 악기인지요!” (서신 235) 그러나 불레즈는 런던, 뉴욕, 바이로이트에서의 경험에 대해서는 어떠한 증언도 남기지 않았다. 수브친스키는 불레즈의 《파르지팔》 녹음에 대해 가차 없는 평가를 내렸다(서신 232). 하지만 그가 《니벨룽의 반지》나 팔레 가르니에에서 공연된 《룰루》 전곡판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다. 마찬가지로 수브친스키가 푸르트벵글러와 함께했던 자신의 경험을 불레즈에게 어떻게 전달했는지에 대해서도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두 사람 사이에 이루어진 많은 대화가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는다. 특히 1970\~1980년대에 불레즈가 파리를 보다 정기적으로 방문하게 되면서 직접 만나 나눈 대화들이 그러하다. 그러나 1980년, 수브친스키가 관현악을 위한 《노타시옹》(Notations pour orchestre)에 관해 남긴 한마디는 그가 얼마나 적은 말로 작품의 본질을 포착할 수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처음으로 당신의 오케스트레이션에—분명히 말하지만, 바로 오케스트레이션에—찬란한 빛과 극적인 표현력이 나타났습니다. 누가 알겠습니까. 어쩌면 당신의 천재성이 새로운 창작의 주기를 시작하려는 문턱에 서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서신 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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