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erre Boulez: Organised Delirium 2-2

‘A FLAYED LION’: BOULEZ AS STUDENT pp. 72-71.

Potter, Caroline. Pierre Boulez: Organised Delirium. Woodbridge: The Boydell Press, 2025.

막간: 불레즈와 옹드 마르트노

메시앙은 초기 전자악기인 옹드 마르트노와의 연관성 때문에도 불레즈에게 중요한 인물이었다. 이러한 열정은 그의 동시대 음악가들 여러 명도 공유했으며, 이들은 특히 이 악기가 지닌 미분음적 가능성에 매료되었다. 이 악기가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것은 상당 부분 메시앙이 이를 사용했기 때문인데, 가장 유명한 사례는 《튀랑갈릴라 교향곡》(1948)이며, 훗날 메시앙의 처제가 되는 잔 로리오는 20세기 옹드 마르트노의 대표적인 연주자가 되었다. 불레즈는 1943년에서 1944년 사이에 작곡되었지만 1945년 4월이 되어서야 초연된 메시앙의 《신의 현존에 관한 세 개의 작은 전례(Trois petites liturgies de la Présence Divine)》 리허설에 참석하면서 옹드 마르트노를 발견하였다. 그러나 불레즈와 가장 가까웠던 동급생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보다 훨씬 이전부터 이 악기에 익숙했다. 불레즈의 음악적 형성에서 옹드 마르트노가 수행한 흥미로운 역할은 어느 정도 자세히 살펴볼 가치가 있다.

옹드 마르트노는 발명가 모리스 마르트노(Maurice Martenot)가 1928년 4월 20일 파리 오페라에서 파리 대중에게 처음 소개했지만, 1937년 파리 국제박람회에 등장하면서 훨씬 더 폭넓은 대중에게 알려졌다. 이 박람회에서 마르트노의 여동생 지네트는 8명의 여성 옹디스트로 구성된 앙상블을 지휘하였다. 이들은 모두 흘러내리는 듯한 그리스풍의 흰색 드레스를 입었으며, 1937년 9월 중순부터 11월까지 거의 매일 적어도 한 차례 공연하였다.⁴¹ 이것들은 실제 라이브 공연은 아니었다. 연주자들은 야외 행사장에 설치된 확성기를 통해 흘러나오는 녹음에 맞추어 연주하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옹드 앙상블의 독특한 음향과 연주자들의 인상적인 외양은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 악기는 박람회의 두 가지 주제인 예술과 기술을 적절하게 결합하였다. 모리스와 지네트 마르트노는 모두 이 박람회 참여로 Grand Prix de l’Exposition을 수상했으며, 박람회를 위해 작품을 위촉받은 18명의 작곡가 가운데 11명이 옹드를 위한 작품을 썼다.⁴²

1937년 10월 1일 《Guide du concert》에 실린 광고를 보면 옹드 공연 일정에는 지네트 마르트노의 앙상블뿐 아니라 다른 연주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 당시 열세 살이던 세르주 니그였으며, 그는 ‘Un jeune virtuose des Ondes(옹드의 젊은 비르투오소)’라고 소개되었다. 피터 아시모프가 적절히 지적했듯, 프로그램에서 명시적으로 ‘비르투오소’라고 표현된 연주자는 니그가 유일하다.⁴³ 따라서 훗날 불레즈의 동급생이 되는 니그는 옹드를 매우 일찍 받아들인 인물이었다. 이베트 그리모는 1937년 박람회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그녀 역시 이 악기의 젊은 선구자였다. 그리모는 열여덟 살이던 1938년 모리스와 지네트 마르트노를 통해 메시앙에게 소개되었으므로, 니그와 마찬가지로 마르트노 가족에게 이 악기를 배웠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모는 또한 신동이었다. 고향 알제에서 불과 열한 살 때 한 피아노 연주가 언론의 주목을 받았으며, 초기의 다른 공개 연주로는 1942년 렌에서 첼리스트 폴 토르틀리에의 반주를 맡은 것이 있었다.⁴⁴

반면 불레즈는 신동이 아니었다. 이본 로리오는 어린 시절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전곡과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들을 포함한 표준 피아노 레퍼토리를 익혔지만, 불레즈는 피아노를 능숙하게 연주하게 되었음에도 훗날 동급생이 되는 이들처럼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집중적으로 몰입했던 경험이 없었다. 그는 중등학교 마지막 2년을 리옹에서 보내면서 처음으로 실제 관현악 연주를 들었다. 그러나 니그와 그리모보다 늦게 옹드 마르트노를 접했음에도, 1940년대 중반에는 전문 연주자 수준으로 이 악기를 익혔다. 당시에는 마르트노 가족을 통하지 않고서는 수업을 받을 방법이 없었다. 불레즈는 음악원에서 마르트노의 수업에도 참석했으며, 이렇게 회상했다. ‘그들은 당시 이 악기가 잘 알려져 있지 않았고 등록한 학생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나에게 그의 수업을 들어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이미 그 악기를 완전히 익힌 상태였지만 이를 받아들였다. 최초의 학생들이 들어옴으로써 이 수업이 존재할 명분이 생겼다.’⁴⁵ 잔 로리오 역시 1947년에 시작된 최초의 옹드 마르트노 수업의 학생이었다. 1947년 메시앙에게 파리 음악원에서 작곡을 배웠던 벨기에 작곡가 카렐 후이바르츠(Karel Goeyvaerts)는 회고록에서 마르트노의 집에서 옹드를 개인적으로 배웠다고 썼다. 그는 이렇게 회상했다. ‘모리스 마르트노의 전자악기는 당시 유행의 절정에 있었다. 메시앙의 제자들 중 몇몇도 그것을 사용해보았다. 불레즈와 그리모는 파동[ondes]에 완전히 매료되어 있었고, [이본] 로리오는 자신의 것을 여동생에게 넘겨주었다.’⁴⁶

다소 놀랍게도 당시의 옹드 마르트노에 대한 열광과 비서구 음악에 대한 열광 사이에는 여러 연결점이 존재한다. 1931년 식민지 박람회와 같은 이전의 파리 대규모 박람회 역시 국제적인 성격이 강했으며, 프랑스 식민제국 및 그 밖의 지역에서 온 음악 앙상블들의 공연이 열렸다. 1937년 박람회에서도 음악 프로그램의 상당 부분은 비서구 음악 또는 그 주제를 프랑스 음악 안으로 흡수한 결과를 보여주었다. 모리스 마르트노 자신도 서양 전통 외부의 음악에서 영감을 받았다. 실제로 아시모프의 표현에 따르면 그는

“자바와 인도 음악을 경험한 것을 악기의 구조에 통합하였다. […] 마르트노는 1930~31년 장기간의 세계 순회 중 자바 수라바야에서 가믈란 연주에 매료되었고, 그 결과 막 대신 금속제 공(gong)을 내장한 스피커인 diffuseur métallique를 개발하기로 결정하였다. 또 다른 일화에 따르면 지네트 마르트노가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와 우연히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 모리스 마르트노는 인도학자 알랭 다니엘루(Alain Daniélou)와 협력하여 여러 인도 선법에 맞게 조절할 수 있도록 가변형 건반을 갖춘 악기 모델을 개발하게 되었다.”⁴⁷

1937년 박람회에 출품된 두 음악 작품은 서로 다른 작곡가들이 이 새로운 프랑스 악기를 어떻게 비유럽적 영감의 원천과 결합했는지를 보여준다. 옹드 마르트노를 위해 작품을 쓴 최초의 작곡가 중 한 명인 피에르 벨론(Pierre Vellones)은 《Fête fantastique》를 출품했는데, 여기에서는 옹드와 Musée de l’Homme의 소장품에서 가져온 악기들을 병치하였다.⁴⁸ 마디 소바조(Mady Sauvageot)의 《Danse rituelle araucane》는 옹드와 피아노를 위해 작곡 되었으며 칠레의 부족적 주제에 기초하였다. 아시모프에 따르면 소바조의 작품은,

‘ 이국적인 의례의 음향을 드러내는데, 끈질기게 반복되는 타악기적 성격과 극단적인 음역의 날카로운 음색이 특징이다. 주제적 재료는 삼전음(tritone)을 중심으로 구성되고 삼전음으로 중복된다. 다른 어떤 악기도 이와 같은 음색을 지니지 않는다는 프로그램 해설의 주장은 옹드 마르트노와 음악적 ‘타자성(otherness)’ 사이의 연관성을 더욱 명확하게 해주는 흥미로운 함의를 지닌다./⁴⁹

오늘날 옹드 마르트노는 흔히 초현실적인 SF 효과음과 연관되지만, 1930~40년대 프랑스에서는 이 악기의 ‘타자성’과의 관계가 오히려 비서구 음악과 연결되어 있었다. 옹드는 마치 서양 악기(예를 들어 피아노)와 다른 문화 사이를 연결하는 통로처럼 기능할 수 있었으며, 타악기가 흔히 그 사이에서 중개자 역할을 하였다. 또한 이 악기는 프랑스 음악사의 지속적인 흐름 가운데 하나인 음색에 대한 매혹을 구현하고 있다.

불레즈의 형성기에 마디 소바조(Mady Sauvageot, 1898–1987)가 지닌 중요성은 과소평가되어 왔다. 그녀는 프랑스 민족음악학의 선구자로 기메 박물관의 녹음 부서에서 일했으며, 동시에 성악가이기도 했다. 그녀는 베르나르-들라피에르가 후원한 1945년 비슈네그라드스키 음악회와, 1947년에 이루어진 불레즈의 《Le Visage nuptial》 초판본의 최초 부분 연주에 모두 참여했다. 이 작품에는 두 대의 옹드 마르트노를 위한 파트가 포함되어 있다. 소바조는 불레즈에게 박물관의 녹음 컬렉션을 소개하고 그의 초기 작품을 적극적으로 지지함으로써 그의 음악적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또 한 명의 여성이었다.

피아니스트, 작곡가, 성장 중이던 민족음악학자이자 옹드 마르트노 애호가였던 이베트 그리모의 복합적인 전문성은 불레즈 자신의 여러 관심사를 북돋우고 강화하였다. 작곡가로서 그녀는 옹드의 초기 옹호자였다. 오늘날 연구할 수 있는 그녀의 음악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2014년 그녀의 자필악보 경매 카탈로그에 따르면 그녀가 작곡한 작품에는 두 대의 옹드 마르트노와 피아노를 위한 《Mélopée》(1940), 그리고 ‘Très lent – expressif’(매우 느리게—표현적으로)라는 표현기호를 제목으로 삼은 옹드 또는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작품(1943)이 포함되어 있다.⁵⁰ 불레즈와 관련해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그녀의 성악·옹드 마르트노·피아노를 위한 《Trois pièces》가 1948년 팔레르모 ISCM 음악제에서 연주되면서 보다 폭넓은 주목을 받았다는 점이다. 그 악기 편성은 《Le Visage nuptial》 초판본의 편성과 놀랄 만큼 유사하다.

옹드 마르트노와 피아노의 조합은 음향적 관점에서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편성은 아니다. 두 악기의 음색 사이에는 명백한 접점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마도 이 듀오는 첼로와 피아노처럼 보다 전통적인 이중주 관계를 반영하려는 의도였을 수 있으며, 피아노가 반주 역할을 담당했을 가능성이 있다. (여기서 모리스 마르트노 자신이 첼리스트였으며, 개념적으로 옹드를 건반악기군의 일원이 아니라 현악기로 생각했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그리모는 옹드를 일종의 유사 현악기(pseudo-string instrument)로 취급한 유일한 프랑스 작곡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자크 참케르텐(Jacques Tchamkerten)은 자크 샤이에, 오네게르, 캉틀루브 등 초기 옹드 작곡가들이 jeu au ruban의 ‘극도로 표현적인 특성’에 매료되었다고 지적한다. 이는 손가락을 금속 리본을 따라 위아래로 미끄러뜨리는 연주기법 가운데 하나를 가리킨다. 그러나 참케르텐에게 앙드레 졸리베의 《Trois poèmes pour ondes Martenot et piano》(1935)는 이 악기에 새로운 표현의 세계를 열었다. 이전 작곡가들과 달리 졸리베는 이 악기에서 점점 더 거칠고, 날카롭고, 가슴을 찢는 듯한 음향을 요구했으며, 이는 음악이 지닌 영광스러운 폭력성과 거리낌 없이 원초적인 성격을 나타내는 것이었다.⁵¹ 졸리베의 옹드와 피아노를 위한 작품 가운데 두 번째 곡은 그의 피아노 모음곡 《Mana》의 세 번째 곡인 ‘La Princesse de Bali’를 개작한 것으로, 이 악장은 불레즈에게 강한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비서구 음악과 옹드 마르트노 사이의 이러한 연결은 1930~40년대 프랑스 젊은 작곡가들의 동시대 문화 환경을 반영하는 하나의 합류점을 보여준다. 불레즈 자신이 옹드를 처음 접한 것은 메시앙의 《Trois petites liturgies》를 통해서였는데, 이 작품에서 옹드는 가믈란을 연상시키는 메탈로폰, 피아노, 첼레스타, 여성합창과 함께 배치된다. 메시앙은 이후 《튀랑갈릴라 교향곡》에서도 이 악기를 사용했으며, 여기서는 종종 현악기의 음향을 중복하거나 다른 방식으로 강화한다. 그러나 이후 메시앙의 작품에서 옹드는 30여 년 뒤에 작곡된 오페라 《Saint François d’Assise》(1975–83)에 이르기까지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불레즈의 출판된 작품 가운데 옹드 마르트노를 사용하는 작품은 하나도 없지만, 초기 작품 몇몇에는 이 악기가 등장한다. 그는 처음에는 이 악기의 음색—《Le Visage nuptial》 초판본이 분명하게 보여주듯이—과 미분음적 가능성에 관심을 가졌지만, 정확한 연주의 어려움 때문에 정밀한 미분음 기보를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1945~46년의 《Quatuor pour ondes Martenot》에서 가져온 재료는 미분음을 제외한 채 다른 작품에서 재활용되었다. 옹드는 《Notations》의 최초 미출판 관현악판(1945–46)과 앙리 미쇼의 연극 《Chaînes》(1946)을 위한 부수음악에서도 사용되었는데, 후자 역시 출판되지 않은 흥미로운 작품이다. 또한 《Le Visage nuptial》 초판본에서도 사용 되었다. 《Chaînes》와 《Le Visage nuptial》에서는 옹드와 성악 파트 모두 미분음 기보를 사용한다.

모리스 마르트노는 자신의 발명품 이외에도 프랑스 음악계에서 폭넓은 인맥을 가지고 있었다. 1942년에는 피에르 셰페르와 함께 Radio France의 실험적인 ‘Studio d’essai’를 공동 설립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리고 불레즈의 음악적 발전에 대한 그의 영향은 옹드 교사로서의 역할을 넘어섰다. 그는 1946년 겨울 음악회를 조직했는데, 이 자리에서 불레즈 자신이 《피아노 소나타 제1번》을 처음으로 연주하였다.⁵² 이 비공개 음악회에 관한 정보는 2차 자료에서만 발견되는데, 예를 들어 조앤 페이저의 기록에는 지휘자 로제 데조르미에르와 작곡가 니콜라스 나보코프(또 다른 러시아 망명자), 버질 톰슨이 참석했다고 되어 있다.⁵³ (이베트 그리모는 같은 해 후반 이 소나타를 공개 초연하였다.)

파리에서 스스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던 젊은 불레즈는 프리랜서 옹디스트(ondiste, 옹드 마르트노 연주자)로 일했으며, 이 부업을 통해 중요한 인맥을 형성하였다. 도미니크 자뫼는 특히 불레즈가 ‘1945년부터 Folies-Bergère에서 옹디스트로 일했다’고 기록한다.⁵⁴ Folies-Bergère의 음악감독 피에르 라리외(Pierre Larrieu) 역시 유명한 옹드 연주자였으며, 당시 옹드는 동시대 관객들에게 첨단적으로 느껴졌을 각종 음향효과를 만드는 인기 있는 수단이었다. 라리외는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초 사이 자신이 옹드 독주를 맡은 부수음악 LP를 발매하기도 했다.⁵⁵

불레즈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Théâtre Marigny를 거점으로 활동하던 장루이 바로(Jean-Louis Barrault)와 마들렌 르노(Madeleine Renaud)의 극단이 옹드 연주자를 필요로 했을 때 이들을 만나게 되었다는 점이다. 불레즈가 르노–바로 극단에 합류했을 때 처음에는 두 명의 음악감독 가운데 한 명으로 들어갔으며, 다른 한 사람은 모리스 자르(Maurice Jarre)였다. 당시 아직 작곡가로 알려져 있지 않았던 자르는 팀파니스트로 훈련받았으며, 타악기 연주자로서의 그의 역할은 극단에서 피아니스트이자 옹디스트였던 불레즈의 역할을 보완하였다. 불레즈는 곧 르노–바로 극단의 단독 음악감독이 되었으며, 자르는 1951년부터 1963년까지 Théâtre National Populaire의 음악감독으로 활동하였다. 르노–바로 극단에서 불레즈가 맡은 일에는 매우 다양한 작품의 연주와 음악감독이 포함되었다. 그 시작은 1946년 지드가 번역한 《Hamlet》을 위해 오네게르가 작곡한 부수음악이었으며, 여기서 불레즈는 옹드 마르트노를 연주하고 자르는 타악기를 연주하였다.⁵⁶

메시앙의 《신적 현존에 관한 세 개의 작은 전례곡(Trois petites liturgies de la Présence Divine)》 초연은 파리 음악계에서 악명 높은 사건이었으며, 불레즈와 그의 동급생들이 논쟁의 대상이 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그 현장에 있었다. 메시앙 작품의 초연은 원래 1944년 6월, Concerts de la Pléiade의 후원 아래 예정되어 있었다. 프랑스 현대음악을 장려할 목적으로 열린 이 열 차례의 연주회 시리즈는 1943년 2월에 시작되었으며, 명망 높은 플레야드 문학 총서의 출판사인 Nouvelle Revue Française가 재정을 지원했다. 각 연주회에서 이 단체가 위촉한 두 편의 신작을 선보이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시리즈는 전쟁 기간 동안 현대음악을 들을 수 있는 드문 기회를 제공했다.⁵⁷ 이 연주회들은 초청받은 사람들만 참석할 수 있는 비공개 행사였으며, 여기에는 흥미로운 또 하나의 연결고리가 있다. 1940년대 후반부터 불레즈의 가까운 친구였던 앙드레 셰프네르(André Schaeffner)가 1943년부터 1947년까지 이 연주회들을 기획했다는 것이다.⁵⁸

그러나 잦은 정전 등 파리 해방 이후의 여러 사정 때문에 《Trois petites liturgies》의 초연은 1945년 4월 21일까지 연기되었고, 이는 해방 이후 처음 열린 Pléiade 연주회였다. 이때 이본 로리오(Yvonne Loriod)가 피아노 독주를 맡았고, 지네트 마르트노(Ginette Martenot)가 옹드 마르트노를, 이베트 그리모(Yvette Grimaud)가 첼레스타를 연주했으며, 오케스트라와 여성 합창단은 로제 데조르미에르(Roger Désormière)가 지휘했다. 불레즈 역시 초연에서 작은 역할을 맡아 비브라폰 연주자의 악보를 넘겨 주었다(그 연주자는 아마도 펠릭스 파세론느 Félix Passeronne였을 것이다. 그는 메시앙에게 비브라폰, 마림바, 실로림바를 비롯한 여러 유율 타악기(pitched percussion)를 소개한 선구적인 타악기 연주자였다).⁵⁹

불레즈에 따르면 청중은 ‘매우 열광적’이었지만, 언론에서는 스캔들이 벌어졌다.⁶⁰ 메시앙의 초연은 당시 그의 음악적 가치에 관한 격렬한 논쟁 속에서 이루어졌고, 언론에서는 이를 일반적으로 ‘le cas Messiaen’(메시앙 사건)이라고 불렀다. 베르나르 가보티(Bernard Gavoty)는 Clarendon이라는 필명으로 신문 《Le Figaro》에 글을 썼으며 메시앙을 비판한 주요 인물 중 한 명이었다. 그는 특히 메시앙이 자신의 작품에 붙인 해설문을 문제 삼았다. 한편 클로드 로스탕(Claude Rostand)은 《Trois petites liturgies》를 화려하게 묘사하며 ‘번쩍이는 장식과 거짓된 장엄함과 사이비 신비주의로 이루어진 이 작품, 더러운 손톱과 축축한 손을 지닌 이 작품, 부풀어 오른 안색과 병들어 늘어진 살집을 지니고, 유해한 물질로 가득 찬 채, 립스틱을 바른 천사처럼 불안하게 주위를 둘러보는 작품’이라고 평했다.⁶¹ 메시앙이 이러한 적대적인 반응에 상처를 받은 것은 당연했지만, ‘그의 학생들에게 […] 이 사건은 오히려 강렬한 자극이 되었다. 니그(Nigg)는 훗날 《Trois petites liturgies》가 “독일 점령의 끔찍한 세월이 끝난 뒤 이 나라의 정신적 쇄신을 상징했다”고 회고했다.’⁶²

메시앙은 《Trois petites liturgies》에 사용된 금속 타악기군을 명시적으로 ‘가믈란(gamelan)’이라고 불렀으며, 자신이 개인 제자들에게 들려주었던 발리와 자바 음악과 직접적인 연관성을 만들었다. 비서구 음악 자료를 대하는 메시앙과 불레즈의 방식에는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차이가 있다. 메시앙은 민족음악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힌두(샤른가데바, Śārṅgadeva)의 리듬을 상당히 변형된 형태로 자신의 작품에 도입했을지는 모르지만, 그가 127개의 리듬 공식을 접한 출처는 백과사전의 한 항목이었다. (여기에는 그가 음악원 화성학 학생들에게 주었던 화성 공식 목록과의 유사점이 있다.) 메시앙이 알베르 라비냐크(Albert Lavignac)의 《Encyclopédie de la musique et dictionnaire du Conservatoire》를 자료로 사용한 것은, 에릭 사티가 라루스 백과사전에서 사실들을 발견하는 데 열광했고 이후 그것들을 자신의 작품에 도입했던 것과도 유사하다.

불레즈와 메시앙에게 공통된 것은 비서구 음악에 대한 감정적인 반응이었다. 그들이 단지 자신의 작품을 자극할 수 있는 이국적인 음향에만 매혹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예를 들어 메시앙은 1931년 식민지 박람회(Exposition Coloniale)에서 발리 가믈란과 무용수들을 보았고, 사후 출판된 자신의 논문에서 이 공연에 대한 반응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나는 처음으로 아낙 아궁 게데 만데라(Anak Agung Gede Mandera)와 그의 발리 가믈란 오케스트라, 그리고 눈과 목과 손의 경이로운 움직임을 보고 들었다. 소리의 리듬과 시각적 리듬은 내게 너무나 강렬한 인상을 주어, 나는 평생 그것에 각인되고, 그것에 스며들고, 그것에 의해 변화되었다. 여기서 나처럼 리듬을 사랑하는 발리의 나의 자매들과 형제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⁶³

그는 음악 못지않게 무용수들의 시각적인 장관과 움직임에 매혹되었다. 또한 그는 가믈란에 대한 자신의 열광을 이야기하면서 드뷔시와의 연관성도 강조한다. 그의 음악에 관한 한, 예를 들어 《Trois petites liturgies》와 《Turangalîla》에 등장하는 여러 대의 메탈로폰과 공은 그가 가믈란의 금속성 음향을 접하지 않았다면 결코 쓰이지 않았을 것이다.

메시앙은 또한 녹음된 소리에서도 영감을 받았는데, 특히 Musée de l’Homme 소장 녹음들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는 이 녹음들을 1944년 3월 기 베르나르-들라피에르(Guy Bernard-Delapierre)의 집에서 빌려 들어보았다.⁶⁴ 불레즈 역시 녹음에서 자극을 받았지만, 셰프네르와 심하 아롬(Simha Arom)을 비롯한 다른 민족음악학자들과 오랫동안 교류하면서 결국 자신이 사랑했던 음향의 맥락에 훨씬 더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또한 그는 온갖 종류의 공과 종을 수집했는데, 바덴바덴 자택의 작업실 사진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으며, 셰프네르에게 보낸 공개된 편지들 가운데 몇 통은 특정 악기를 구입하려 했던 그의 시도에 관한 것이다.⁶⁵

불레즈의 학생 시절 작품들: 《Trois Psalmodies》, 《Notations》

피터 오헤이건(Peter O’Hagan)은 불레즈가 여전히 보라부르-오네게르(Vaurabourg-Honegger)에게 대위법을, 음악원에서 메시앙에게 화성학을 배우고 있던 1944~45년의 작곡 활동을 상세하게 다루었다. 이 초기 작품들은 불레즈가 음렬 기법을 사용하기 이전의 것이다. 이 시기의 주요 결실은 각각 세 악장으로 구성된 두 개의 피아노 작품이었다. 《Prélude, Toccata et Scherzo》(1944~45년 겨울)와 1945년 여름에 쓰기 시작한 《Trois Psalmodies》이다. 두 작품 모두 출판되지 않았고, 전자는 불레즈 생전에는 연주되지 않았지만, 그의 사후 네덜란드 피아니스트 랄프 판 라트(Ralph van Raat)가 이 작품을 적극적으로 연주했으며, 2018년 9월 파리 필하모니에서 공개 초연을 했다.⁶⁶ 오헤이건은 이 작품의 음악 언어에서 메시앙, 졸리베, 오네게르의 영향을 지적한다.

《Trois Psalmodies》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지만, 이 작품은 불레즈의 문학적·음악적 취향이 발전해가는 과정 또한 보여주기 때문에 여기서의 논의와 관련해서는 더욱 흥미롭다. 우선 제목부터 눈에 띈다. 《Prélude, Toccata et Scherzo》의 일반적인 악장 명칭에서 벗어나, 불레즈는 곧바로 종교적 음악 장르, 구체적으로는 시편을 노래하거나 낭송하는 행위를 연상시키는 제목을 사용한다. 불레즈의 성장 배경은 그의 시대 프랑스인으로서는 전형적으로 종교적인 것이었다. 그는 명목상 가톨릭 신앙 안에서 성장했고(가톨릭 초등학교 Institut Victor Laprade에 다녔다),⁶⁷ 성인이 된 뒤에는 교회에 다니지 않았지만 평생 종교적 함의를 지닌 제목을 사용했다. 그가 ‘Psalmodie’라는 제목을 사용한 것은 메시앙, 구체적으로는 불레즈의 작품 바로 전에 작곡된 《Trois petites liturgies》의 악장 제목들(‘Antienne’, ‘Séquence’, ‘Psalmodie’)에서 촉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불레즈에게는 이보다 앞서 작곡된, 작곡 연대가 불확실한 같은 제목의 피아노 작품도 존재한다.⁶⁸ 오헤이건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메시앙이 이 작품에 응답창 형식의 시편창(responsorial psalmody)을 도입한 것이 불레즈에게 자신의 작품을 위한 출발점을 제시했다. 특히 앞의 두 곡의 분절적 형식은 랩소디적인 악구와 엄격한 리듬으로 이루어진 악구를 병치한다는 점에서 메시앙의 《Liturgies》 중 첫 번째 곡을 연상시키는데, 그 작품에서는 거의 즉흥적인 피아노 서법이 코랄과 같은 성격을 지닌 성악 부분과 대조를 이룬다.’⁶⁹

오헤이건은 또한 첫 번째 《Psalmodie》의 필사본 마지막에 ‘En souvenir de Saint-Henri’(성 앙리를 기리며)라는 헌사가 적혀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는 축일이 7월 13일인 성인을 가리키는데, 악보에 적힌 완성일보다 하루 앞선 날짜다.⁷⁰ (그 작품 제목의 종교적 함의를 생각하면, 불레즈가 완성일인 7월 14일과 관련된 너무나 명백한 국가적 기념일을 언급하지 않기로 한 것은 어쩌면 의미심장할 수도 있다.) 만약 psalmody라는 언급이 실제로 하나의 구조화 장치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불레즈가 훨씬 뒤인 《피아노 소나타 제3번》에 이르러서도 이와 유사한 제목으로 돌아갔다는 점은 흥미롭다. 이 작품의 예비 판본은 1958년 작곡가 자신에 의해 연주되었는데, 그 첫 악장의 제목은 ‘Antiphonie’이며, 출판되지 않은 미완성의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악장 역시 《Trois petites liturgies》의 한 악장과 같은 ‘Séquence’라는 제목을 지닌다.

그러나 《Trois Psalmodies》의 배후에는 명백히 세속적인 관념들도 존재한다. 첫 번째 곡의 필사본에는 앙드레 지드(André Gide)의 반자전적인 《Les Nourritures terrestres》(1895)에서 가져온 구절이 인용되어 있다. 이 작품은 시와 산문으로 느슨하게 연결된 서사로, 지드가 자신이 성장한 경건하고 보수적인 종교적 환경을 거부하고 북아프리카에서 감각적으로 각성하는 과정을 표현한다. 불레즈는 열네 행으로 된 시 가운데 다섯 행만을 인용한다. 첫 행과 마지막 행, 그리고 가운데 세 행이다.⁷¹

나는 내 눈꺼풀을 식히러 갈 샘을 알고 있다 […]
밤이 온통 내려앉을 차가운 샘.
아침이 모습을 드러낼 얼음물
희디흰 빛에 떨며. 순결의 샘. […]
내가 그곳에 가 타오르는 눈꺼풀을 씻게 될 때.

불레즈가 생략한 행들은 자연의 다른 측면들(숲, 나뭇잎)과 밤이 내려오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그는 또한 저녁이 다가오면서 인간의 감정을 보다 명시적으로 드러내는 인상적인 구절, ‘déjà la caresse de l’air / Nous invitera plus au sommeil qu’à l’amour’(이미 공기의 어루만짐은 / 우리를 사랑보다는 잠으로 더 이끌 것이다)도 생략한다. 지드의 이 시는 1893년 알제리 블리다(Blida)로 요양 여행을 떠났을 때 쓰였으며, 자기 발견의 시기에 만들어졌다. 《Les Nourritures terrestres》에서 이 시 뒤에는 자연 속에서의 감각적 각성이라는 주제를 이어가는 ‘Lettre à Nathanaël’이 나오며, 다음과 같은 말로 끝난다. ‘나는 내가 따르는 길이 나의 길이며, 내가 마땅히 따라야 할 방식으로 그것을 따르고 있다고 믿는다. 어떤 서약이라도 했다면 신앙이라고 불렸을 법한 거대한 확신이 이제 내게 습관처럼 자리 잡았다.’⁷² 나다나엘(Nathanaël)은 작가의 관심 대상인 젊은 소년이다. 지드는 1895년 사촌 마들렌과 결혼했지만, 이 결혼은 성관계가 없는 결혼이 되었으며 그의 주된 성적 지향은 소년들을 향해 있었다.

지드는 불레즈가 성장하던 시기 프랑스의 주요 문화적 인물이었다. 그는 1947년 노벨문학상을 받았으며, 불레즈가 《Les Nourritures terrestres》에서 가져온 제사를 사용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작가가 불레즈에게 중요했다고 추정할 수도 있다. 또한 불레즈의 동급생 세르주 니그(Serge Nigg)의 첫 작품이 지드의 《Perséphone》에 곡을 붙인 작품이었다는 사실 역시 불레즈의 눈에 띄지 않았을 리 없다. 이 작품은 스트라빈스키의 1934년 대규모 작품과 동일한 원전을 사용했다.⁷³ 그러나 불레즈는 곧 지드와 거리를 두었고, 그 제사를 붉은 연필로 지워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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