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abbit 03
아이는 넋을 놓고 그 옷들을 바라봤다. 살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단순히 비싼 재료로 만들어져서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진심을 담아 한 땀 한 땀 소중하게 지어낸 옷이었다. 소매자락의 끝에 달려 있는 레이스는 얼마나 보관을 잘했는지 단 한올도 흐트러지지 않은 채로 보존되어 있었다. 도대체 누가 이런 옷을 입은걸까, 라고 아이는 생각했다. 동화 속의 공주님일까, 아니면 엄청 돈이 많은 사람일까? 드레스의 붉은 벨벳은 보드라운 결이 살아 있었고, 안쪽에는 베이지색과 연한 푸른색 줄무늬의 실크가 덧대어져 있었다. 그 안에 누군가의 살결이 닿아 있었을거란 생각이 들자 아이는 조금 무서워졌다. 몸통에 수놓아진 작은 보석들은 금실로 단단히 묶여 반짝임을 더했고, 그 주위에는 같은 금실로 작은 꽃잎들이 촘촘히 수놓아져 있었다. 마치 세상의 모든 소중한 것들을 모아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이는 문득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찬찬히 훑어봤다.
검은색과 흰색 줄무늬 티셔츠, 베이지색 면 반바지, 운동화. 반바지 끝에는 아까 먹다 흘린 아이스크림이 조금 묻어 있었다. 그 옆에는 라즈베리의 붉은 물도 희미하게 배어 있었다. 운동화는 고모 집에 온 뒤로 한 번도 빨지 않아 지저분했고, 티셔츠는 세탁기에서 꺼내자마자 입어서 잔뜩 구겨져 있었다. 양말은 매일 갈아 신었으니 그나마 가장 깨끗했다. 그래봐야 인터넷에서 열 켤레씩 한 세트로 파는 평범한 면 양말이었다. 외국으로 나오기 직전 급하게 사서 가방에 집어넣은 것이었다. 그 어느 것도 심사숙고해서 고른 흔적도, 조심해서 다룬 흔적도 없었다.
아이는 붉은 벨벳 드레스 앞에 한참을 서있었다. 정말 더운 여름이었다. 꼭대기 층에는 성당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문이 있었고,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더위를 식히려는 사람들이 그 앞으로 몰려들었다.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사람의 수를 제한해야 했기 때문에 관리인마저 문 앞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아 있었다. 금실로 보석과 아름다운 모양들이 수놓아진 이 붉은 드레스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롯이 아이 혼자였다. 문득 아이가 드레스 쪽으로 손을 뻗었다. 앞에는 만지지 말라는 안내판과 접근을 막는 로프가 쳐져 있을 뿐이었다. 아이는 먼저 벨벳 위에 손을 얹었다. 아까 손에 묻은 아이스크림의 끈적임이 아직 손끝에 남아 부드러운 결의 촉감은 잘 느껴지지 않는다. 대신 뜨뜻한 온기만 느껴질 뿐이다. 손을 옮겨가 보석 위에 손을 얹어 놓는다. 아주 작은 알갱이이다. 포도알보다 작고, 체리보다도 작다. 아주 작은 구슬 같다. 검붉은 색의 작은 구슬. 아이가 만진 루비는 붉은 옷감 위에서 빛을 더이상 흡수하지 못하고 아주 깊고 어두운 빛을 내고 있었다. 그리고 손가락은 바로 옆에 수놓아진 금빛 잎사귀로 옮겨간다. 실이 한 겹, 또 한 겹 포개진 감촉이 손끝에 걸렸다. 생각했던 것보다 차가운 느낌이 든다. 아이는 완전히 매료되어 있었다. 누가 다가오고 있는지도 전혀 모르는 채로 손가락 끝의 감각만 쫓고 있다. 아이는 마지막으로 레이스에 손을 댔다.
하얀색 레이스. 단 한번도 더러워 진 적이 없는 것처럼 새하얗다. 자세히 보면 작은 꽃봉오리 같은 무늬들이 가느다란 실을 따라 줄지어 있었다. 아이는 아마 그때 처음으로 레이스라는 것을 만져보았을 것이다. 아주 얇고 아주 가늘다. 자칫 잘못 만지면 뜯어질 것만 같이 연약하다. 마치 한낮의 더위에 시들어버린 꽃잎처럼 축 늘어져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갓 다려나온 것 마냥 생생하다. 마치 어제 만든 것처럼, 누군가가 깨끗하게 세탁을 해서 막 걸어둔 것처럼. 이 레이스는 앞선 본 보석보다, 금실보다 더 자극적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잘 보관된 값비싼 물건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오랫동안 아끼고, 몇 번이고 손질하고, 더러워지지 않도록 살피며 간직해온 것처럼 보였다. 비싼 물건이라는 말로만 설명될 수 없는 종류의 귀함이 거기에는 있었다.
아이는 자신이 언제부터 레이스를 그렇게 세게 움켜쥐고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손안에서 가느다란 실들이 조금씩 당겨지고 있다는 것도, 손가락 사이에서 꽃봉오리 하나가 일그러지고 있다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이 들었다.
투둑.
아주 작은 감촉이었다. 손끝에서 무언가가 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