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그 방에 들어섰을 때의 온도감을 기억한다. 약간의 긴장감과 이제 더이상 물러설수 없다라는 결의 같은 것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처음 와보는 도시에서 내가 얼굴을 아는 단 한사람, 하지만 아직 낯선 이였던 그에게 내 트렁크를 맡기고, 방에 올라온다. 마치 자주 왔던 곳인 것처럼 태연한 척 편안한 얼굴을 내비친다. 사실 속으로는 차가운 샤도네 한잔을 마시고 싶다. 어색함 속에서 올라오는 목마름과 긴장감을 가지고서, 조용히 하얀 코트를 벗어 소파 위에 얹어 둔다. 눈을 마주보는 게 아직은 마음에 큰 파동을 불러일으킬 것만 같아 눈길을 피한다. 어딜 보아야 할지 몰라 어색한 두 눈은 방안 어딘가를 계속해서 두리번 거리고 있고, 갈곳없는 손은 분주하게 움직인다. 선물 받은 작은 꽃들을 물에 꽂아 두기 위해 유리 글라스를 찾는다. 리본을 푸르고, 꽃을 싸고 있던 비닐을 고이 접어둔다. 꽃이 시들더라도 이 리본은 간직하고 싶다. 테이블 위에 꽃을 얹어두면서, 굳이 사부작거리며 가방과 그 안에 들어있던 안경과 펜, 장갑 등을 함께 빼둔다. 손가락 끝이 차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동안, 응접실에 앉아있던 그는 창문 밖을 응시하고 있다. 아마 나를 바로 보기에는 재채기가 날 것 같이 어색하고 간지러웠겠지. 창문 밖으로는 벽돌 건물들이 보이고, 또 그 앞에는 높은 고층 건물도 있다. 그 사이로 하늘색 수평선이 보인다. 옅게 깔린 안개 속에서, 밝게 빛나는 바다의 수평선이 눈에 들어온다.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바다인지도 아득할 정도로, 바다의 투명함은 하늘의 모든 색을 그대로 받아 들이고 있다. 얼마만큼의 희생인지 혹은 아픔인지도 전혀 모르는 채로.
너에게 하얀 캔버스 같은 순간을 주고 싶었다. 네가 무얼 그리던, 무얼 원하던, 마치 저 바다처럼 무엇이든 받아 들일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입고 간 하얗고 뽀얀 긴 코트는 이미 소파 위에 얹어져 있고, 검은 옷들을 마저 벗어둔다. 식사를 하러 가기 전, 실크 스커트로 갈아 입었다. 무릎 아래에서 찰랑 거리는 미색의 스커트이다. 그리고 레이스에 비즈가 수놓아진 낮은 뮬을 신었다. 이 신발을 신은 발걸음이 마치 궁전의 어딘가를 헤메는 어느 귀부인 발처럼, 분주하고 가볍길 바랐다. 옅은 향수 냄새. 너의 가느다랗고 긴 속눈썹처럼, 깃털처럼 가벼운 꽃 향기이다. 단, 조금도 무겁거나 진지하고 싶지 않아서, 목덜미에 향을 조금 바른다. 만약에 어느 순간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하면 이 향들이 따스한 열에 증발하며, 쿵쿵 거리며 뜀박질치는 심장소리에 맞춰 진동 하겠지. 그 향이 느껴지면 즉시, 물러서야 한다. 내가 조금씩 무너지고 있다는 증표일테니.
바쁜 걸음으로 점심 식사를 하러 나선다. 분위기가 좋은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었다. 이 테이블의 서버를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이 전혀 드나들지 않는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눈에 들어오는 몇몇 해바라기 그림들이 눈에 들어온다. 주황 배경에 노란 해바라기들이 만개한, 작열하는 태양 빛이 느껴질것만 같은 그림이었다. 동시에 머리 위에서 내리쬐는 할로겐 불빛은 그 그림의 열기를 직접 전해주는 것만 같았다. 문득, 우리가 처음 만난 날, 언덕 위에서 느꼈던 뜨거운 햇빛이 떠올랐다. 열기를 피할 어떤 그늘도 없는 언덕의 한 중턱에 우리 둘은 나란이 앉아 있었다. 정수리로 내려 꽂히는 듯한 해의 열기는 우리를 둘러싼 얇은 경계의 막을 다 태워버리는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숨길 것이 없다는 듯이 단 조금의 경계심도 없었던 시간이었다. 정말? 솔직하기가 어렵다. 어쩌면 우리 위로 쏟아지던 그 열기는 우리를 계속해서 따라 다니는 뜨거운 꿈의 열기였을지도 모른다.
벽돌 건물들 사이를 걸어다닌다. 아이스크림과 커피를 마시고,
지나오는 카페앞에서 귀여운 강아지들을 본다.
차를 타고 호텔로 돌아온다.
급하게 예약을 해서인지 호텔엔 비싼 카테고리의 방만 남아 있었다. 내가 지낸 방은 가운데 미닫이 문이 있어서 방으로 분리가 되는 스위트 룸이었고, 거실엔 소파와 데스크가 있었다. 두 공간으로 분리가 되는, 나와 손님의 공간이 분리되는 방이었다. 나는 침실 안 쪽의 창틀에 앉아 있다. 해를 등지고서. 아직 여름의 따스한 해가 남아있다. 네이비 컬러의 니트를 입고서, 따스함에 흠뻑 젖어 있었다. 너는 여전히 거실의 소파에 앉아있다. 노을이 지기전 해가 갑자기 주황색으로 바뀐다. 아까 바다를 가득 메우던 하얀 빛은 온데간데 없고, 주황색 햇빛이 창을 넘어 가득 들어온다. 창틀에 앉아 머리카락을 넘기며 긴 팔을 움직이자 반대편 벽에 주황색을 머금은 나의 실루엣이 그대로 그려진다. 너는 다가와 그 모습을 찍어준다. 아직은, 문지방을 넘지 못한채로, 거실에 몸을 둔채, 침실 안쪽을 바라본다. 아직은 어색하다. 우리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이채로 이 거리를 지킬 것인지, 아니면 한발짝 더 다가올 것인지.
자세를 바꿔 다리를 포개어 앉는다. 창틀은 내 발이 닿지 않을 정도로 높이 있다. 발가락 끝에 매달려있던 뮬이 바닥에 떨어지고 만다. 너는 내게 다가와 떨어진 두개의 뮬을 나란이 정돈하고, 근처 의자를 끌고와 내 앞에 앉는다. 너는 그제서야 내 발가락에 발라진 매니큐어 색을 볼수 있게 되었다. 빨간색? 아님 옅은 분홍색? 네 등뒤로 하얀 시트가 보인다. 아직은 반들반들하고 잘 정돈된 시트. 난 널 보고있다. 너의 손이 실수로 살짝 내 치마 끝에 닿았다. 미세한 떨림이 있다. 결코 넘을 수 없는 듯이, 아주 조그마한 진동을 내게 남긴다. 그 진동이 계속해서 내게 밀어 닥치고, 내가 가진 박동들이 합쳐지면 어느 순간에는 큰 파동을 일으키겠지. 하지만 아직은 알수 없다. 너의 가지런한 손톱 끝이 나를 향해 있다. 치마 위에 얹어진 너의 손이 내 치마와 함께 주황빛으로 물든다. 그리고 너의 가느다란 팔목을 살짝 덮고 있는 하얀 옥스포드 셔츠도 나의 치마와 같은 색으로 변해있다. 잘 다려진 하얀 셔츠. 왠지 조금 흐트러뜨리고 싶다. 나의 흔들리는 치마 끝처럼.
책 읽어줄까? 한참 우리가 이야기하던, 내가 읽던 책을 들고왔다.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그림자. 나는 우리가 이 주인공들을 닮아 있다고 생각한다. 너는 내게 도리언 그레이 같은 사람이었다. 순수하고 맑은 사람, 많은 것들을 흡수할 준비가 되어있는 넌 무수히 많은 가능성으로 가득차 있는 작은 우주와도 같았다. 그리고 젊고 아름다운 것까지. 오스카 와일드의 책 구절들을 읽는다. 하지만 나는 이내 침대 위로 옮겨왔다. 넓은 치맛단을 편채로, 종아리를 치마 아래 숨긴채로 엎드린다. 치마 아래로 수줍은 듯한 복숭아뼈가 보인다. 내가 네게 제안한다, 조금 더 편하게 있자고, 옆으로 오라고. 너는 침대 가까이에 의자를 두고 앉아있다가, 망설이며 침대 모서리에 살짝 앉는다. 곧, 곧게 누운 채로 팔을 옆으로 펼친 네 어깨 위에 책을 얹는다. 접어둔 페이지들을 모두 읽기엔 내용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아무 페이지나 읽을 수 있는 부분들을 최대한으로 읽어본다. 너는 내 이야길 듣고 있었을까? 나는 어떤 페이지를 읽었는지 전혀 기억나질 않는다. 여전히 해가 지지 않아 네 셔츠는 주황빛이다.
저녁을 먹을 시간이 다가오고, 예약해 둔 식당들이 많았지만, 사실 배가 고픈 것은 아니었다. 모든 예약을 취소하고 우린 방에 남기로 한다. 룸 서비스로 식사를 시키고, 네게 부탁해서 아래 바에서 마티니 한잔을 사서 가져와 달라고 했다. 그 사이에 나는 조금 생각할 여유가 있었다. 지난 여름 이태리에 다녀오면서 나는 얼마간 용기를 내기로 결정 했었다. 많은 시행착오와 결정으로 가득한 한해였다. 그 끝에 나는 이제 내가 선택하고 고른 것에 대해 믿기로, 그리고 내게 지금 주어진 아름다운 순간들에 완전히 집중하기로 결심했다. '나의 삶이 내가 너무 아름다운 시간을 지나가고 있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지나가고 있는 이 순간들을 아쉬워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망설이고 있다, 그 끝에 다가온 이 뜨거운 열기를 취할것인지 말것인지.
낮에 마저 식히지 못했던 열기는 마티니의 강한 향과 함께 가라앉는 듯했다. 동시에 해가 저물고 있었다. 주황색 안개가 가득했던 해안선 너머로 어두운 블루가 깔리기 시작했다. 세상의 모든 빛을 거두어 가면서, 수평선 너머로 주황빛이 모두 사그라들며, 그 빛의 끝자락에 짙은 블루가 따라왔다. 이제 설레임으로 가득한 은밀한 생명력들이 빛을 발할 시간이었다.
식사는 형편 없었다. 내 위장에는 오로지 마티니의 뜨거운 알콜기운만이 남아있다. 사실 나는 이 쯤 부터는, 더 이상 동요하지 않았다. 술기운을 빌릴 수도 없을 정도로 정신은 말짱했고, 나는 시시각각 변하는 모먼트들에서 캐치해야할 것들을 계속해서 분석하고 있었다. 나는 이 곳에 오는 것으로 한번 너를 허락했고, 너는 두번 나의 영역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넌 곧 가야한다.
뭐였을까. 절망감이었을까? 아니면 실망감? 난 무엇을 기대 했을까. 난 왜 여기에 온걸까. 여기에서 우리가 뒤돌아 걸어가면 그 끝엔 뭐가 있을까? 두려웠을까? 한가지 확실한건 호기심 같은 건 없었다. 다만, 네 마음도 내 마음과 같은지, 흔들리는 치맛자락에서 나의 조바심이 작은 경련을 내고 있었다. 그리고 넌 그 끝에서 흔들리는 방울소리를 들었던 걸까, 수줍은 듯한 장막을 모두 걷어내고, 성큼성큼 내게로 다가와 넌 내게 키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