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926
한 주를 조용히 쉬고있다. 지난 주말에 중요한 공연들이 있었고, 그것 때문에 잔뜩 날이 서있었다. 읽어야할 책도 많고, 내 입장을 뭐라고 정리해야할지 고민이 많았던 시간이었다. 정신적으로 타이트하지만 그만큼 성과가 있었고, 무척 행복했다. 그리고 오늘은 집에 앉아 쉬면서 최근 나를 스쳐간 몇몇 말들을 생각해 보는 하루였다. 유독 이번 해에는 움직임이 많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다양한 충격과 변화를 겪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나는 내가 생각했던 미래를 보내고 있는 것 같다. 20대 때 피로하다고 느꼈던 많은 것들을 쳐내고,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던 몇 마디 말들을 거둬내고 지금은 그런 것들이 영향을 주지 못하는 곳에 서 있다. 이런 상태를 늘 꿈꿔왔다. 많은 에너지를 모아서 방향을 정하지 않은 채로 유유히 지내는 것. 어쩌면 지금 내게 필요한 만큼 모든 것들이 충분히 잘 갖춰져 있는지도 모른다. 필요한 만큼의 에너지와 경제적 자유, 그리고 속박되지 않은 채로 동시에 내가 받는 사랑들로 가득한 것. 아, 이제는 내가 받는 사랑이라는 게, 결국 내가 주는 사랑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사랑하는 아이가 근처에서 전하는 이야기들이 나에게 정말 큰 울림을 준다. 아마 나보다 더 멀리, 더 높이 올라갈테지. 나는 그냥 그가 행복하기만을 바란다. 건강하고. 이럴때 보면 내가 이제 나이가 드나 싶다.(웃음) 오늘의 대화에서 그 아이는 내가 놓치고 있었던 무언가를 짚어냈다. 나는 좋은 소리와 좋지 않은 소리를 엄격하게 구분해 낸다. 하지만 좋지 않은 소리란 무엇인가? 노이즈? 아니면 밸런스를 깨뜨리는 소리? 그보다도 그 좋지 않은 소리의 존재 이유가 좋은 소리를 알게 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 또한 필요한 소리가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면 내가 그토록 열심히 가르고 또 갈랐던 기준선들이 하염없이 투명해지고 만다.
삶에서도 마찬가지. 유해한 관계가 나를 계속해서 생각하게 만들고, 번복하게 만들고, 또 불편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유해해서 내게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에너지를 빼앗기 때문에 부정적인 것일 뿐(특히 에너지가 고갈되어 있을 때), 어쩌면 내게 중요한 것들의 배경이 되어 오히려 더 선명한 기준들을 정립하게 해준다는 점에서는 내게 긍정적인 자극일 수 있는 것이다.
계속해서 읽고 있는 1950년대의 시대사가 지금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는 여전히 기준을 깨고 싶어 하고, 그 기준이 무엇인지를 고민한다. 그러나 하나의 기준을 깨고 새로운 기준을 세우는 일은 결국 또 다른 구별을 만들어내는 일이기도 하다. 가르고 나누는 것은 엄정한 구별을 가능하게 하지만, 그 구별은 다시 그만큼의 한계를 갖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생각해보건대, 기준을 깨고 새로운 방향을 추구하는 것보다 서로 다른 기준과 방향들이 여기에, 또 저기에 공존하도록 두는 것은 어떨까. 좋은 소리와 그렇지 않은 소리를 굳이 가르지 않을 때, 비로소 더 많은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