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is: Biography of a City

Jones, Colin. Paris: Biography of a City. Illustrated reprint ed. London: Viking, 2005.

<Haussmannism and the City of Modernity 1851-89> p. 344

세기 말 무렵의 파리는 새로운 경계, 새로운 구성,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새로운 정체성을 지닌 근대성(modernity)의 도시로 변화하게 된다. 제2제국의 혁신은, 구시가지 옆이나 외곽에 새로 건물을 짓는 방식이 아니라, 파리 중심부 한가운데, 즉 루이 보나파르트의 권력 장악에 반대하고 1851년 쿠데타에 저항했던 급진적 상퀼로트 계층의 본거지에 처음으로 혁신의 초점을 둠으로써 이루어졌다.

아마도 이 변화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직선적이고 넓은 도로망의 새롭고 보다 통합된 체계였을 것이다. 이 도로들은 이미 ‘구파리(le Vieux Paris)’라고 불리기 시작한 옛 도시 조직을 가로지르며 찢고 지나갔다. 3공화국 시기 내내 보나파르트 가문은 철저히 외면받았기 때문에, 도시 개조의 영향력은 ‘나폴레옹주의(Napoleonism)’가 아니라 ‘오스만주의(Haussmannism)’라는 이름으로 기억되었다.

p. 348

이들에겐 근대 도시는 하나의 유기체였으며, 도시 기능을 엄밀히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분석해야 한다고 보았다. 나폴레옹과 오스만은 자신들을 도시를 진단하고 관리하는 ‘의사-도시계획가(physician-urbanists)’로 여겼다.

그들의 임무는 다음과 같았다:

• 파리에게 영양을 공급하고

• 동맥(즉, 거리)을 통해 순환을 조절하고 가속화하며

• 폐(즉, 녹지 공간)를 강화하여 숨 쉬게 만들고

• 노폐물을 위생적이고 효율적으로 처리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나폴레옹이 1855년, 1867년의 국제 박람회에서 세계에 자랑스럽게 선보인 ‘새로운 파리’의 모습이었다.

P. 358

게다가 이러한 도시 해체는 1848년에 도입되어 1852년에 재확인된 규정들에 의해 더욱 촉진 되었는데, 이 규정들은 거리 건설 프로젝트에서 프레펙(지방 행정장관)의 권한을 강화시켰다. 원래 철도 개발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고안 되었던 1841년 규정은 랑뷔토가 그의 도시화 프로젝트에서 사용했던 것으로, 새 거리의 경로에 실제로 위치한 부동산의 공익 목적 수용을 허용했다. 1852년 칙령은 거리 인접 지역의 부동산들도 계획의 영향을 받는 경우 강제 수용의 대상이 되어 개발에 제공되어야 한다고 명시했다. 이는 혼란스럽고 복잡했던 거리와 건물의 구획들을 거의 외과적으로 직선 도로망으로 대체할 수 있게 했다. 또한 철거된 건물들을 대체할 새로운 건물의 건설을 가능하게 했다. 전형적으로 이러한 작업들은 자가 금융 방식으로 전환되었는데, 대개 비위생적인 오래된 건물들은 도시 개발자들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매각되었고, 이들은 이를 매력적이고 고급스러운 부동산으로 교체하여 매매하거나 주거 및 상업 공간으로 임대할 수 있었다. 이는 자본 축적을 가능하게 했고, 이는 또 다른 투기적 건축에 투자될 수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이 시기에 등장한 근대 은행 부문의 성장에도 부합하였다.

이 부동산 개발의 회전놀이에 참여한 이들에게 있어, 오스만은 사적 에너지와 공공 에너지를 결합해 새로운 주거지를 건설하고, 대규모 고용(오스만 개발 절정기에 파리 노동 인구의 5분의 1이 건설업에 종사했다)을 창출하며, 공중 보건에 신호탄을 제공하고, 도시를 아름답게 만들며, 금융 부르주아지에게는 두둑한 수익까지 제공하는 일종의 선순환 구조를 발명한 것으로 보였다. 나폴레옹과 오스만이 근대화된 파리를 위해 품었던 ‘가장 높은 소명’이라는 개념은, 장기적으로는 도시 성장이 자가 금융될 것이라는 낙관적인 계산에 기반하고 있었다. 베르제 전 프레펙과 같은 많은 재정 비관론자들은 오스만이 원하는 규모의 새로운 건설을 도시가 감당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것은 정체 상태의 재정 계산이었다. 오스만은 그의 계산에 ‘생산적 지출’ — 사실상 차입 재정 — 이 도시를 더 크고, 더 부유하고, 더 매력적으로 만들 것이라는 전제를 포함시켰다. 파리를 세계 도시로 개발함으로써, 주민들이 더 많은 소득을 가지게 하고, 관광객들이 대거 방문하게 되면, 이러한 잉여 부를 간접세의 형태로, 특히 소비에 대한 간접세로 쉽게 환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P. 366

실제로 나폴레옹 3세나 오스만이 군사적이고 억압적인 목적을 위해 대로를 건설하라고 명령한 공식 문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오스만화(hausmannization) 과정에 기여한 억압 외의 다양한 동기들을 과소평가하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사회적 개선과 ‘전략적 미화(strategic embellishment)’를 통해 파리 민중의 정치적 저항을 약화시키고자 하는 의지가 오스만과 그의 동료들의 마음속에 무겁게 자리잡고 있었음은 거의 확실하다.

민중의 급진주의는 콜레라나 이질 같은 반사회적 전염병으로 널리 인식되었다. 나폴레옹은 1848년 6월 봉기나, 자신이 일으킨 1851년 12월 쿠데타에 저항해 파리 시민들이 보여준 저항 — 특히 포부르 뒤 템플(Faubourg du Temple) 지역에서의 시위대는 여러 차례 기병대 돌격으로만 해산될 수 있었다 — 가 다시 벌어질까 두려워했다. 오스만이 상정한 도시적 근대 생활의 비전은 대중 저항의 제거를 전제로 했다. “그는 동시에 전염병과 혁명을 상대로 일했다”고 푸르넬은 적었다.

“이건 구 파리의 내장을 도려내는 일이다.” 오스만은 노동자 계급 지역에서의 파괴 작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봉기와 바리케이드의 동네를 없애는 일이지.” 대로는 전통적인 파리식 급진주의의 상징적 도구였던 바리케이드를 사실상 무력화시켰다.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에 따르면, 바리케이드는 이미 상징적인 가치만 남은 전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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