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ropean Architecture 1750–1890

Bergdoll, Barry. European Architecture 1750–1890. Oxford History of Art. New York –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0.

<The City Transformed 1848-90> p. 241

나폴레옹 1세의 대표적인 거리인 리볼리 거리(rue de Rivoli)는 수십 년에 걸쳐 형성되었다. 그의 조카 나폴레옹 3세는 그의 측근이자 1853년 6월 센 데파르트망의 현장감독관(Prefect)으로 임명된 조르주 오스만 남작(Georges Haussmann, 1809–1891)과 함께, 이전 정부들이 단편적으로 탐색해왔던 도시 개혁의 과정을 가속화시켰다. 1840년대 시골 지역에서 철도가 가져온 변화의 규모가 이제 도시에 unleashed 되었고, 파리는 그 어느 때보다 유럽인의 의식 속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제국 수도를 과시하기 위한 쇼케이스로 만들겠다는 결심 아래, 오스만과 나폴레옹 3세는 1855년 만국박람회에 맞추어 도시를 재편하기 위해 ‘유통(circulation), 건강(health), 보안(security)’이라는 깃발 아래 파리 재설계의 중추가 될 대형 교차축의 완공을 목표로, 투기꾼들에게 20년간의 세금 면제를 제공했다. 아케이드 형식의 리볼리 거리는, 서쪽 쿠르브부아(Courbevoie)의 병영부터 동쪽의 혁명의 상징 바스티유 광장까지 파리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거대한 축 속에 흡수될 예정이었다.

<The City Transformed 1848-90> p. 242

철도 여행이 원자재, 완제품, 노동자뿐만 아니라 새로운 유형의 도시 소비자들, 즉 관광객들을 전례 없는 거리로 이동시키기 시작하면서, 호텔은 유럽 대도시들에서 점점 더 중요한 시설이 되었다. 알프레드 아르망(Alfred Armand)이 설계한 이 호텔은 철도 붐이 일어난 1840년대에 그들의 제국을 출범시킨 은행가이자 토지 개발업자인 페레르 형제(Pereire brothers)의 프로젝트였다. 그들은 리볼리 거리(rue de Rivoli)를 따라 국가의 수용으로 정리된 대부분의 부지를 우선적인 가격에 사들였다. 나폴레옹 3세처럼, 이들 역시 생시몽주의(Saint-Simonian) 이데올로기에 깊이 빠져 있었으며, 이는 국가 영토를 재구획하고 자본의 흐름을 자유롭게 만드는 것이 나라를 현대화하는 동시에 공동선을 증진시킨다고 믿는 사상이었다.

1867년 두 번째 파리 만국박람회(Universal Exposition)를 위해 다시 도시를 찾은 방문객들은 프레데릭 르 플레(Frédéric Le Play)가 세계의 풍요로움을 하나의 정교한 조직 체계 아래에 배치한 거대한 타원형 건물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방사형 축은 다양한 제조업 카테고리에 헌정되었고, 이 거대한 유리와 철 구조물의 동심원에는 각국의 전시가 이루어져 분류학적 및 국가적 비교가 가능하게 되었다. 도시 역시, 철도역들을 상업 중심지와 연결하는 새로운 방사형 도로망과 함께 새로운 질서, 청결, 효율, 아름다움의 기준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Urban reform before Haussmann>, p. 244

하나의 도시 전체—그리고 그 안에 강력하게 일관된 시각적 형태—에 교통, 여가, 심지어 위생까지 겹겹이 잘 작동하는 시스템을 주입할 수 있다는 감각이었다. 1841년, 프랑스 철도망이 파리를 모든 국경과 신속히 연결해야 한다는 선언이 내려진 이후, 파리는 일련의 원형 교차점(rond-points)에서 방사형으로 뻗어나가는 거리들로 탈바꿈되었고, 이 거리들은 새로운 철도역들의 고리를 도심과 연결하며, 1860년 이후에는 도시 주변의 산업화된 마을들을 통합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Garnier's Opera> p. 245

런던은 이미 길을 제시했는데, 뉴 옥스퍼드 스트리트(New Oxford Street)와 같은 도로 절개(street cuts)를 통해 빈민가들을 철거하고 동시에 통행로를 열어주는 방식을 사용한 것이다. 이는 에드윈 채드윅(Edwin Chadwick)의 도시 빈민에 대한 통계 조사와, ‘대도시 및 인구 밀집 지역의 상태에 관한 의회 위원회(Parliamentary Commission on the State of Large Towns and Populous Districts)’의 조사에 따른 조치였다.

두 보고서는 노동자 계급의 건강과 도덕성은 투기적인 과밀 주거와 비위생적인 거리라는 물리적 환경과 상관관계가 있다고 선언했다.

법률은 위생, 배수, 통풍 면에서 주거의 최소 기준을 의무화했고, 의료 검사를 시행했으며, 도시 하수도 건설 캠페인을 시작했다.

<Garnier's Opera> p. 252

오페라 정면 광장의 양옆을 이루는 두 개의 동일한 필라스터(붙임 기둥) 장식이 있는 파사드는 내부가 전혀 다른 기능—하나는 오피스 빌딩, 다른 하나는 고급 호텔—을 지닌 건물임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다.

이 단정한 외관 뒤에는 페레르 형제와 알프레드 아르망 팀이 만든 또 다른 프로젝트인 그랑 호텔(Grand Hotel)이 있다. 이 호텔은 제2제정 시기의 가장 호화롭고 웅장한 공간들 중 일부를 담고 있으며, 완전히 시야에서 가려진 철골 프레임 덕분에 가능해진 넓은 구조적 스팬을 활용하고 있다. 이 철골 구조는 석회석 파사드 뒤에 완전히 숨겨져 있다.

반면 오페라 극장은 그 자체로 ‘그랜드 퍼블릭 빌딩(grand public building)’은 그 구성 요소들의 기능이 평면도와 입면도 상에 명확하게 드러나야 한다는 에콜 데 보자르(École des Beaux-Arts)의 원칙을 완벽히 구현해낸 사례이다. 건물 구성에는 명확한 위계질서가 존재하며, 조형적 처리의 유연함(plasticity), 풍부한 장식 디테일의 입체감, 그리고 가르니에가 도입한 다채로운 색상의 대리석, 모자이크, 금박(gilding) 등은 건물 외부에서도 보일 정도로 화려하며, 당시 아카데믹한 건축의 단정한 규범을 벗어난 대담한 혁신으로 여겨졌다.

<Garnier's Opera> p. 253

가르니에는 오페라 설계를 마치고 1871년 <극장(The Théâtre)>이라는 저서를 통해 자신이 추구한 건축 철학을 표현했는데, 이는 한때 스승이었던 비올레-르-뒤크(Viollet-le-Duc)의 합리주의적 구조 표현론을 명확히 거부하는 입장이었다. 가르니에는 철과 새로운 기술을 이용하되, 그것들을 작가의 상상력과 사회의 꿈과 욕망을 실현하는 수단으로 삼아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건축이란 사회의 판타지와 역할극의 본능을 담아내는 장치라 믿었으며, 그에 따르면 건축가는 시대의 기계 기술보다도 ‘놀이’와 ‘극장성’이라는 인간의 본질적 욕망에 반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번역)가르니에는 자신의 디자인을 경험적이고 감각적인 건축 접근 방식의 구현으로 간주했고, 이 입장은 1871년에 발행된 『극장(The Theatre)』이라는 저서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이는 한때 그의 고용주였던 비올레-르-뒤크(Viollet-le-Duc)가 주장한 재료와 구조의 표현에 대한 합리주의적 요구에 대한 논쟁적인 거부였지만, 결코 임의적인 것은 아니었다. 가르니에는 철이 예술가의 상상력과 사회의 꿈과 환상을 건축으로 구현하려는 능력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수단으로 활용되어야 한다고 확고히 믿었다.

그는 예술가의 눈과 판단력, 심지어는 취향의 우위를 주장했지만, 동시에 인간 행동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을 지닌 관찰자이기도 했다. 그의 통찰력은 당시 경험적 관찰 이후에야 이론화를 시도하던 새로운 사회과학 분야의 실천가들조차도 부러워할 만한 수준이었다.

셈퍼(Semper)와 마찬가지로, 가르니에의 건축 개념은 재현(representation)의 이론에 기반을 두고 있었지만, 그것은 제작의 기술에 있지 않고, 연기(play-acting)에서 느껴지는 인간의 기본적인 즐거움을 관찰하는 데에 있었다. 그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극장이고 재현이다”라고 주장했다.

다시금 원초적인 불꽃(primordial fire)이 상정되며, 가르니에는 그 불꽃을 둘러싸고 사람들이 그림자 인형극을 만들어내는 사회적 의례(social rituals)가 형성된다고 상상했다. 어떤 개인이 그 불꽃을 활용해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다른 이들이 그 곁에 모여 처음엔 관객이 되었다가, 시간이 지나면 기꺼이 역할을 바꿔가며 함께한다.

그 시기의 무대 기계, 환기 시스템, 가스 조명, 철을 이용한 건축 기술의 엄청난 발전에도 불구하고—이 모든 것은 전문 방문자들이 감탄할 만한 것이었지만—가르니에에게 있어 건축가의 본질적이고 변하지 않는 역할은 ‘사람들이 역할을 맡고, 연극과 구경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을 수용하는 것이었다.

(다른 번역)그는 세상 모든 일이 ‘극장과 재현(theatre and representation)’이라고 말하며, 한 사람이 불꽃을 이용해 그림자 놀이를 시작하고, 이 주변에 사람들이 모이며 **관객과 연기자 역할을 번갈아 맡는 사회적 의례(rituals)**가 형성된다는 구상을 펼쳤다. 가르니에는 경험을 통해 관찰하는 사회과학자보다도 인간 행동에 대한 통찰력이 깊었다. 그래서 그의 오페라 극장은 시대의 기술 진보—기계 장치, 환기, 가스 조명, 철골 구조—를 반영하면서도, 본질적으로는 사람들이 ‘보고, 보이며’, ‘역할을 연기하는’ 욕망을 만족시키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20세기 초의 아방가르드, 특히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는 이러한 오페라 극장을 기득권에 아첨하는 건축이라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에게 있어 가르니에는 예술을 더 나은 세상을 여는 도구로 쓰기보다는, 현 상태(status quo)의 아름다움을 꾸며주는 데 그쳤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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