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RUBINSTEIN TAUGHT ME TO PLAY

Josef Hofmann, Piano Playing: With Piano Questions Answered (Philadelphia: Theodore Presser Co., 1909), 57–70.

대개 베를린에서—당시 나는 베를린에 살고 있었다—그를 찾아가면, 그는 러시아 담배를 피우며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는 오텔 드 뢰로프(Hôtel de l'Europe)에 살고 있었다. 다정하게 인사를 건넨 뒤에는 언제나 똑같은 질문을 했다.

“그래, 세상에 무슨 새로운 일이 있나?”

나는 이렇게 대답했던 것이 기억난다.

“저는 새로운 것을 아는 게 없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것을 배우러 온 겁니다—선생님께요.”

루빈스타인은 내 말에 담긴 음악적인 의미를 즉시 알아차리고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그날의 레슨은 아주 좋은 시간이 될 것 같았다.

내가 찾아갈 때면 그는 대개 혼자가 아니었다. 몇 명의 나이 든 부인들, 때로는 아주 연로한 부인들—대부분 러시아인이었다—그리고 몇몇 젊은 여성들이 방문해 있었다. 남자는 거의 없었다.

그는 손짓으로 방 한쪽 구석에 놓인 피아노를 가리켰다. 베히슈타인(Bechstein)이었는데, 대부분의 경우 끔찍할 정도로 조율이 맞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자기 피아노의 그런 상태에 언제나 태연할 정도로 무관심했다.

내가 연주하는 동안 그는 계속 책상 앞에 앉아 작품의 악보를 들여다보았다. 그는 언제나 내가 연주할 작품의 악보를 반드시 가져오게 했으며, 쓰여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을 연주해야 한다고 고집했다.

내가 연주하는 모든 음을, 인쇄된 악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하나하나 따라갔다.

그는 분명 지독할 정도로 꼼꼼한 사람이었고, 악보에 쓰인 문자 그대로를 철저하게 고수하는 사람이었다.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특히 똑같은 작품을 자신이 연주할 때에는 얼마나 많은 자유를 누렸는지를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한번은 이 모순처럼 보이는 점을 조심스럽게 지적했다. 그러자 그가 대답했다.

“네가 지금의 내 나이가 되면, 나처럼 해도 좋다—할 수만 있다면.”

한번은 내가 리스트의 《헝가리 광시곡》을 상당히 형편없이 연주한 적이 있었다.

잠시 듣던 그가 말했다.

“네가 지금 이 곡을 연주한 방식이라면, 뭐 이모나 엄마 앞에서 연주하기에는 괜찮겠군.”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내 쪽으로 걸어오며 말했다.

“자, 이제 이런 곡은 어떻게 연주하는지 한번 보자.”

그래서 나는 처음부터 다시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몇 마디도 채 연주하지 않았을 때 그가 끊으며 말했다.

“시작했나?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는데——”

“네, 선생님. 분명히 시작했습니다.”

“아.”

그가 무심하게 말했다.

“난 몰랐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가 묻자 그가 대답했다.

“내 말은 이거다. 손가락이 건반에 닿기 전에 이미 머릿속에서는 곡을 시작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실제 연주를 시작하기 전에 이미 네 머릿속에서 템포, 터치의 방식, 그리고 무엇보다도 첫 음들을 어떻게 어택할 것인지가 결정되어 있어야 한다.

그건 그렇고, 이 곡의 성격은 무엇이지?

극적인가? 비극적인가? 서정적인가? 낭만적인가? 유머러스한가? 영웅적인가? 숭고한가? 신비로운가?

뭔가?

그래, 왜 대답하지 않나?”

그런 장광설을 듣고 나면 나는 대개 뭔가를 중얼거리곤 했다. 하지만 그가 내게 불러일으키는 경외감 때문에 보통은 어리석은 대답을 했다.

결국 그가 제시한 몇 가지 표현들을 이것저것 시도하다 보면 마침내 맞는 답에 도달했다.

그러면 그가 말했다.

“그래, 이제야 됐군! 유머러스하다, 이거지? 좋아! 그리고 광시곡적이고, 불규칙하다—그렇지?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겠나?”

“네.”

“좋아, 그럼.”

그가 대답했다.

“이제 증명해봐.”

그러면 나는 다시 처음부터 연주했다.

그는 내 옆에 서 있었다. 특정한 음을 특별히 강조하기를 원할 때면 그 강력한 손가락으로 내 왼쪽 어깨를 얼마나 세게 눌렀는지, 나는 건반을 거의 찔러대듯 내리쳤고 피아노가 나 대신 비명을 지를 지경이었다.

그것으로도 자신이 원하는 효과가 나오지 않으면, 그는 그냥 자신의 손 전체를 내 손 위에 올려놓고 눌러버렸다. 내 손은 납작하게 펴져 검은건반이고 흰건반이고 할 것 없이 버터처럼 온 건반 위로 퍼졌고, 끔찍한 불협화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면 그가 거의 화를 내듯 말했다.

“하지만 더 깨끗하게, 더 깨끗하게, 더 깨끗하게!”

마치 그 불협화음을 만들어낸 사람이 나인 것처럼 말이다.

이런 일들에는 분명 우스운 면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비극으로 바뀌는 것은 언제나 한순간이었다. 특히 내가 뭔가를 설명하려 하거나 변명을 하려 들면 그랬다.

그래서 나는 대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경험하고 나니 그것이 내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하게 올바른 태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불같이 화를 내는 만큼이나 빠르게 다시 진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곡을 다 연주하고 나면 늘 하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자네는 정말 훌륭한 젊은이야!”

그러면 그동안의 모든 괴로움이 얼마나 빨리 잊혔던지!

한번은 슈베르트-리스트의 《마왕(Erlkönig)》을 연주했던 것이 기억난다.

곡에서 마왕이 아이에게

“사랑스러운 아이야, 어서 나와 함께 가자.”

라고 말하는 부분에 이르렀는데, 나는 틀린 음을 몇 개 연주한 데다 아르페지오까지 형편없이 쳤다.

루빈시테인이 물었다.

“여기 가사가 뭔지 알고 있나?”

나는 대답 대신 그 부분의 가사를 읊었다.

“좋아.”

그가 말했다.

“마왕이 아이에게 말을 걸고 있지. 마왕은 영혼이고, 유령이야. 그러니 이 부분을 영혼처럼(spiritlike), 유령처럼(ghostly) 연주하게. 그래도 좋네. 하지만 틀린 음을 쳐서 끔찍하게(ghastly) 만들지는 말고!”

나는 그 말장난에 웃지 않을 수 없었고, 루빈스타인 자신도 함께 웃었다. 그렇게 곡은 구제되었다—아니, 정확히 말하면 연주자가 구제되었다.

그 부분을 다시 연주했을 때는 아주 잘 되었고, 그는 더 이상 끊지 않고 계속 연주하도록 내버려두었다.

한번은 꽤 복잡한 패시지의 운지법을 그에게 물었다.

그가 대답했다.

“코로 연주해. 그래도 소리만 좋게 내!”

나는 그 말에 당황해서 앉은 채로 그가 도대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생각했다.

지금의 내가 이해하기로, 그 말은 이런 뜻이었다.

스스로 해결하라! 스스로 돕는 자를 하늘도 돕는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루빈스타인은 내가 공부해야 할 작품을 내 앞에서 직접 연주해주는 일이 결코 없었다.

그는 자신이 내게 알려주고 싶은 모든 것을 설명하고, 분석하고, 명확하게 밝혀주었다. 그러나 그것이 끝나면 나를 내 자신의 판단에 맡겼다.

그렇게 해야만 내가 성취한 것이 비로소 온전히 나 자신의 것이며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나의 자산이 된다고 그는 설명했다.

나는 이런 방식으로 루빈스타인에게서 매우 소중한 진실을 배웠다.

다른 사람의 연주를 통해 얻은 음악적 심상(tone-picture)은 우리에게 일시적인 인상만을 남긴다. 그것은 왔다가 사라진다. 하지만 스스로 만들어낸 음악적 심상은 지속되며 우리의 것으로 남는다.

이제 루빈스타인과 공부했던 시절을 돌아보면, 나는 그가 나를 ‘가르쳤다’기보다는 내가 그에게서 배웠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그는 통상적인 의미의 교육자가 아니었다.

그는 내게 멋진 전망이 펼쳐지는 어떤 높은 지점을 가리켜주었다.

하지만 그곳까지 어떻게 올라갈 것인지는 내 문제였다.

그는 거기까지 신경 써주지 않았다.

“코로 연주해!”

그래, 좋다. 하지만 정말 코가 피가 날 때까지 부딪혔다면, 그 피를 닦을 비유적인 손수건은 어디에서 구해야 했을까?

내 상상력 속에서!

그리고 그는 옳았다.

물론 이런 방식이 모든 제자에게 통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방법은 학생 자신의 독창적인 사고를 발달시키고, 그에게 있는 통찰력을 최대한 끌어내는 데 매우 적합하다.

그런 학생이 자신의 공부와 정신적인 힘만으로, 그 위대한 마법사가 자신의 마법으로 보여준 목표 지점까지 마침내 도달하는 데 성공한다면, 그는 자기 자신의 힘에 대한 신뢰를 얻게 된다.

한두 번 길을 잃더라도—진지한 열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럴 수 있다—언제든 다시 그 지점을 찾아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이다.

루빈스타인이 한번 내게 이런 말을 했던 것이 기억난다.

“피아노 연주가 왜 그렇게 어려운지 아나?

쉽게 과장되고 인위적인 연주(affected)가 되거나, 아니면 매너리즘(mannerisms)에 빠지기 때문이지.

운 좋게 이 두 함정을 모두 피하고 나면, 이번에는 연주가—건조해지기 쉽다!

진실은 이 세 가지 해악 사이 어딘가에 있다!

그의 지휘 아래 그의 《피아노 협주곡 D단조》로 함부르크 데뷔를 하기로 결정되었을 때, 나는 마침내 그의 작품 하나를 그와 함께 공부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렇게 제안했지만 루빈시테인은 단번에 거절했다.

그 모습이 지금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토요일이었고,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열린 그의 연주회 휴식 시간이었다. 그는 대기실에 앉아 내게 말했다.

“월요일에 우리는 함부르크에서 함께 연주할 거다.”

시간은 촉박했지만 나는 이미 그 협주곡을 알고 있었고, 남은 이틀 동안 언제라도 그와 한번 곡 전체를 맞춰볼 수 있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 앞에서 협주곡을 연주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그는 내 간절한 부탁을 거절하며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니까!”

이렇게 결정적인 순간에조차 그는 나를 내 자신의 능력에 맡겼다.

마지막 리허설—그리고 유일한 리허설—이 끝난 뒤, 그 위대한 거장은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나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나는—글쎄, ‘일곱 번째 천국’이 아니라 ‘여덟 번째 천국’에 있었다!

모든 것이 잘됐다고 나는 생각했다.

루빈스타인이, 바로 그 루빈스타인이 만족했으니까!

그렇다면 청중도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연주회는 훌륭하게 끝났다.

그 잊을 수 없는 함부르크 데뷔는 1894년 3월 14일이었다.

연주회가 끝난 뒤 나는 곧장 루빈스타인을 찾아갔다. 그것이 내가 그를 마지막으로 보는 순간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그의 커다란 사진 한 장을 가져갔다.

그가 사인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의 서명을 갖고 싶은 마음이 망설임을 이겼고 결국 부탁했다.

그는 두 주먹을 치켜들더니, 반은 화가 나고 반은 웃는 얼굴로 우렁차게 외쳤다.

“Et tu, Brute? — 브루투스, 너마저?”

하지만 결국 내 소원은 이루어졌고, 그 초상사진을 이 글에 함께 싣는다.

그러고 나서 나는 언제 다시 그에게 연주를 들려드리면 되겠느냐고 물었다.

놀랍게도 그가 대답했다.

“다시는.”

절망한 나는 물었다.

“왜 안 됩니까?”

그러자 그 관대한 영혼의 소유자가 내게 말했다.

“얘야, 올바른 피아노 연주와 음악 만들기에 관해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전부 네게 말했다.”

그러더니 말투를 조금 바꾸어 덧붙였다.

“그런데도 네가 아직도 모르겠다면—뭐, 지옥에나 가버려!”

그는 웃으면서 말했지만 진심이라는 것을 나는 너무나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의 곁을 떠났다.

나는 루빈스타인을 다시는 보지 못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근교 페테르호프에 있는 자신의 별장으로 돌아갔고, 그곳에서 1894년 11월 19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이 내게 미친 충격을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세상이 갑자기 완전히 텅 비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어떤 것에도 흥미를 느낄 수 없었다.

그 슬픔을 통해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내 마음이 그 안에 있는 예술가뿐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그 사람까지 얼마나 깊이 숭배하고 있었는지를.

그리고 내가 그를 마치 아버지처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나는 런던에서 첼트넘으로 가는 도중 영국 신문을 통해 그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20일에 그곳에서 리사이틀이 예정되어 있었다.

마침 프로그램에는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 B♭단조》가 들어 있었다.

내가 장송행진곡의 첫 음들을 치는 순간, 청중 전체가 마치 누군가 명령이라도 내린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 위대한 고인을 기리며 곡이 끝날 때까지 모두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그런데 루빈스타인이 세상을 떠난 바로 그날, 그 전날의 내 연주회에서도 기묘한 우연이 하나 있었다.

그날 나는 7년간의 연주 활동 중단 이후—함부르크 데뷔를 제외하면—처음으로 대중 앞에서 연주했다.

런던에서였다.

그 연주회에서 나는 신작으로 E♭단조 폴로네즈를 연주했다. 루빈스타인이 얼마 전 드레스덴에서 작곡하여 내게 헌정한 작품이었다.

그는 이 곡을 《드레스덴의 추억(Souvenirs de Dresde)》이라는 작품집에 포함시켰다.

이 곡은 박자 구조를 제외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장송행진곡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날 그 곡을 연주하면서 내가 그를 영원한 안식으로 보내는 노래를 연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불과 몇 시간 뒤, 유럽의 먼 동쪽에서 나의 위대한 스승은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2년 뒤 나는 그 폴로네즈를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연주했다.

그의 기일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였다.

나는 그의 기억을 기리기 위해 리사이틀을 열었고, 그 수익금은 루빈스타인 기금에 기부했다.

그 이후로 이 곡을 연주한 것은 단 한 번뿐이다.

집에서, 오직 나 자신을 위해서만 연주했다.

그리고 이 곡은 내 공개 연주 레퍼토리에서 완전히 제외했다.

그 작품이 나에게 헌정된 곡이기는 했지만, 처음 연주했던 당시의 시간과 상황 때문에 나는 언제나 이 곡이 여전히 나의 스승에게 속해 있는 것처럼 느꼈기 때문이다.

아니면 기껏해야,

그와 나, 우리 두 사람 사이에만 존재하는 개인적이고 사적인 어떤 것처럼.

Next
Next

NIKHIL BANERJEE INTERVI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