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ulez et Souvtchinsky : de près, de loin, une indéfectible amitié, pp. 15-19.
Boulez, Pierre, and Pierre Souvtchinsky. Cher Pierre… : Correspondance 1947–1985. Edited by Gabriela Elgarrista and Philippe Albèra. Paris and Geneva: Éditions de la Philharmonie de Paris and Contrechamps, 2025.
불레즈는 지휘자로서의 활동을 발전시켜 나가던 시기에 자신의 세대에 속한 작곡가들 사이에서 점점 더 이방인처럼 느끼게 된다. 1957년 말 다름슈타트에서 돌아온 그는 슈토크하우젠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 내가 들은 것들로 인해, 나는 같은 ‘가족’에 속하기를 거부합니다. […]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 모든 사람들이 결국 친구일 수는 없습니다. 이 우정들의 바탕에는 너무나 많은 오해가 깔려 있습니다. 더 이상 거짓말하지 않도록 혼자 살아갑시다! 당신과는 물론 함께하겠지만, 다른 사람들과는 이제 끝입니다¹⁵.” 그러나 이 ‘당신과 함께’라는 관계 자체도 취약했으며, 1950년대에서 1960년대로 넘어가는 시기에 슈토크하우젠의 음악적 변화 앞에서 결국 유지되지 못한다. 이미 《피아노곡 XI》(Klavierstück XI)을 둘러싸고 두 사람 사이에는 상반된 견해가 오갔다. 불레즈는 훗날 푸쇠르와도 멀어지게 되는데, 한때 그와 매우 따뜻한 우정을 나누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새로운 음악적 방향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다¹⁶. 수브친스키와의 서신에서는 노노에 대한 불레즈의 생각과, 도멘 뮈지칼의 한 연주회 이후 마데르나에 대해 품게 된 의구심을 읽을 수 있다(서신 145, 209). 이 시점에서 그는 아직 카터, 베리오, 리게티의 작품이 지닌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세 작곡가는 훗날 그가 친밀감을 느끼게 되고 런던과 뉴욕에서 여러 차례 그들의 작품을 연주하게 될 인물들이었다.(카터는 당시 유럽에서 아직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며, 나머지 두 작곡가 역시 1950년대 말에 이르러서야 자신만의 음악 양식에 도달했다).
이제 자신에게 더 이상 많은 것을 제공하지 못하는 전위음악의 폐쇄적인 세계보다는, 불레즈는 위대한 레퍼토리의 작품들과 직접 대면하고 그것들과 겨루며, 그 작품들에 새로운 해석을 부여하고, 현대음악 작품들을 대중의 공동 의식 속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음악 기관들의 관습적인 관행을 뒤흔드는 일을 선호한다. 불레즈는 이를 통해 무엇이 가능한지를 몸소 보여주는데, 이것이야말로 그에게 진정으로 적합한 유일한 교육 방식이다. 이를 위해 그는 여러 음악 행정가들의 지원을 받았으며, 세월이 흐르면서 그들과 진정한 우정을 발전시켜 나갔다. 바젤의 파울 자허, 런던의 윌리엄 글록, 뉴욕의 카를로스 모즐리, 로스앤젤레스의 어니스트 플라이슈만과 로런스 모턴, 그리고 훗날 파리의 로랑 베일 등이 그들이다. 그들에게 보낸 편지들을 통해 불레즈가 이들에게 품었던 애착과 애정을 가늠할 수 있다. 이 책에 수록된 로런스 모턴에게 보낸 생일 축하 편지 역시 그 한 예다(부록 6.1).
역설적으로 지휘 활동은 불레즈에게 자신을 보호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동시에 그는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더 폭넓은 청중에게 자신의 음악관을 전달할 수 있었다. 지휘자는 그의 인격에서 외부로 드러나는 권위 있고 주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반면, 더욱 복잡한 작곡가로서의 면모는 그늘 속에 남아 있었다. 마찬가지로 그는 이르캄(IRCAM)을 연구 공간으로 구상했으며(그것도 지하에 자리한!), 앙상블 앵테르콩탕포랭(Ensemble InterContemporain)은 그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그 연구 기관의 ‘세속적 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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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계의 조직과 관련된 제도적 문제들은 불레즈의 활동에서 중요한 한 측면을 이루며, 여러 면에서 그의 지휘 활동을 보완한다. 이러한 문제들은 서신에서도 매우 빈번하게 등장한다. 도멘 뮈지칼의 창설과 발전이 그 한 예다. 이 과정에서 수브친스키는 상황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자 불레즈의 오른팔이며 수호천사가 된다. 파리의 예술계와 사교계에 폭넓은 인맥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젊은 불레즈를 수잔 테즈나스에게 소개한다. 그녀는 수많은 예술가와 지식인들이 모이던 유명한 살롱을 운영하고 있었으며, 도멘 뮈지칼 협회의 후원자가 되는 데 동의한다. 장루이 바로와 함께했던 경험에서부터 이르캄의 특정 프로그램들을 통해 기울인 노력에 이르기까지, 불레즈는 언제나 음악이 다른 예술들과 긴밀히 연결된 채 예술적 삶의 중심에 자리하기를 추구했다. 이는 수브친스키 역시 공유했던 생각이었다. 도멘 뮈지칼에서는 다양한 분야의 작가, 화가, 지식인들이 현대음악 작품들과 마주했고, 작곡가들과 직접 의견을 교환할 수 있었다.
같은 정신에서 불레즈와 수브친스키는 당시 프랑스 출판계에 부재했던 새로운 음악에 관한 글들과 중요한 참고 문헌들을 출판하기로 결정한다. 그 결과 도멘 뮈지칼의 회보와 동명의 출판사가 탄생한다. 수브친스키는 이전부터 여러 잡지를 창간하고 운영한 경험이 있었으므로 이러한 출판 사업을 맡았지만, 서신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어려움에 부딪혔다. 그러나 어려움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서신을 읽다 보면 오로지 민간 자금으로 운영되던 연주회들을 조직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문제를 해결해야 했는지 알 수 있다. 게다가 이 연주회들이 모두 성공적이었던 것도 결코 아니었다. 때로는 작품 자체가 설득력이 부족했고, 때로는 연주 수준이 미흡했다. 불레즈는 낙담하곤 했던 수잔 테즈나스를 여러 차례 안심시켜야 했으며, 몇 차례의 좋지 않은 경험 끝에 결국 모든 연주회를 직접 지휘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지휘자로서의 경력이 국제적으로 크게 발전하고 말로와 결별한 이후, 불레즈는 더 이상 운영할 시간이 없는 이 단체를 떠나고 싶다는 뜻을 밝힌다. 어쩌면 그는 더 이상 그 단체의 존재 자체를 진정으로 믿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런던과 뉴욕에서 거둔 성공과 겪었던 어려움은 수브친스키와의 서신에서 거의 기록되지 않았다. 아마도 작곡에 집중하는 것을 방해할 만큼 부담이 큰 활동들에 대해 수브친스키가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르캄과 앙상블 앵테르콩탕포랭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 경우에도 두 사람이 직접 만나 이러한 문제들을 논의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불레즈가 음악 기관들을 위해 그토록 막대한 에너지를 쏟아붓는 것에 대한 수브친스키의 회의적인 시각을 감지하고, 이에 관해 자세히 이야기하는 것을 삼갔을 가능성 역시 크다. 두 사람의 관계는 더 이상 1950년대와 같지 않았다. 반면 수브친스키는 불레즈가 촉발한 여러 논쟁에 휘말리게 된다.
첫 번째 논쟁은 파리에서 강연을 하러 온 앙세르메(Ansermet)와의 갈등이었다. 앙세르메는 그 강연에서 훗날 자신의 저서 『인간 의식 속의 음악의 기초』(Les Fondements de la musique dans la conscience humaine)에서 전개하게 될 생각들을 제시했다. 불레즈가 1951년 5월 그의 접근법을 반박하기 위해 보낸 편지의 어조는 대화의 여지를 거의 남기지 않는 무례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은 지크프리트가 보탄을 자신의 길에서 밀어내는 오이디푸스적 반응을 연상시킨다. “철학 학회에서 하신 그 우스꽝스러운 광대놀음 같은 강연,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지진아들을 위한 초등 산수 강의를 앞으로는 자주 되풀이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서신 19). 앙세르메가 수브친스키에게 답장을 보내면서 자신의 ‘피보호자’가 남긴 글을 ‘파리 똥’이라고 표현하자(서신 20), 불레즈는 다시 펜을 들어 자신의 주장을 더욱 정확히 전개하고 스위스 지휘자에게 교훈을 주려 한다. 그 어조에는 부분적으로 아이러니가 섞여 있었다. 그는 마지막에 일종의 교훈처럼 다음과 같은 모욕적인 문구를 남긴다. “경박한 젊은이가 광기에 빠진 늙은 할망구를 만났을 때나 벌어질 법한 일이었습니다.”(서신 21). 새로운 음악에 대한 입장을 뒤집은 앙세르메는 데조르미에르나 로스바우트와는 달리 불레즈에게 본보기가 될 수 없었다.
또 다른 논쟁은 1962년 당시 프랑스 라디오의 음악 프로그램 책임자이자 장 빌라르의 국립민중극장(TNP)에서 열리는 연주회들의 기획자였던 앙리 바로가 도멘 뮈지칼과의 협력을 제안하면서 시작되었다(서신 179). 바로는 불레즈의 음악관과 매우 동떨어진 관점을 대표했을 뿐 아니라, 불레즈의 눈에는 작곡가가 관료로 변해버린 사례이기도 했다. 그는 이를 프랑스 특유의 부조리이자 결함으로 여겼다. 바로의 어조가 온정주의적이었다면, 어떠한 협력도 거부하는 불레즈의 어조는 신랄했다. 답장에 대한 답장으로 보낸 불레즈의 편지는 경멸적인 아이러니로 충격을 주었다. (바로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얼마 후 수브친스키를 만났을 때까지 그 편지를 끝까지 읽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불레즈는 편지를 쓴 직후 이미 수브친스키에게 그 내용을 전달한 상태였다……)(서신 179~183).
이처럼 도발적인 어조는 뛰어난 문구를 구사하는 감각과 결합되어 있었으며, 불레즈가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집요하고 비타협적으로 옹호하던 입장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파리 음악계의 무기력함과 평범함에 대한 분노에서도 비롯되었는데, 이러한 분노는 서신 전체를 관통하며 수브친스키 역시 상당 부분 공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브친스키의 중재 덕분에 앙리 바로와의 관계는 결국 누그러졌다. 불레즈가 ‘그 사건을 손익을 따져 넘기기로’ 동의한 것이다. 바로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원한을 드러내지 않은 채 불레즈를 ‘예외적인 인물’이라고 묘사한다. 그의 비범한 재능은 행동상의 일탈을 상쇄하며, 이는 바그너나 드뷔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¹⁷.
서신에 기록된 세 번째 논쟁은 스트라빈스키가 사망한 이후 로버트 크래프트를 겨냥한 것이었다. 이번에는 인신공격(ad hominem)이었다. 불레즈는 이 글을 《뉴욕 타임스》에 보내고자 했지만, 당시 그가 음악감독으로 있던 뉴욕 필하모닉의 책임자가 논쟁이 오히려 기관에 불리하게 작용할 것을 우려하여 그를 만류했다. 따라서 이 글은 서신 속에 하나의 문서로만 남게 되었다(서신 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