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tase · Plaisir · Puissance

며칠전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모짜르트 C 단조 미사 공연이 있었다. 소프라노 사빈 드비엘(Sabine Devieilhe)이 메인 보컬을 맡았고, 그녀의 남편인 피숑(Raphaël Pichon)이 이끄는 피그말리온이 앙상블을 맡았다. 좀 다른 얘기지만, 나는 피그말리온 신화를 참 좋아해서 내 홈페이지의 이름 Gala도 갈라테이아에서 가져온 것이다. 당시에 살바도르 달리의 부인이었던 갈라를 잠깐 떠올리기도 했지만, 나에게는 피그말리온 신화가 심리적으로 더 가깝다. 처음에 사빈 드비엘에 대해 알아보다가 그녀의 남편이 이끄는 앙상블이 피그말리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그는 스스로를 피그말리온으로 생각하는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럼 갈라테이아는 그녀이거나, 그가 이끄는 음악이거나 둘중 하나일거라는 생각도 했다.

오늘의 이야기는 꽤 횡설수설할 수 있다.

Extase

헤레베게의 바하B단조 미사를 처음 들었을 때를 기억한다. 이 작품은 신성한 내용을 다루는 종교음악이다. 하지만 엄숙하고 장엄한 화성들 속에서 불현듯 등장하는 반음계적 진행과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긴장 속에서 나는 묘한 감정들을 느끼곤 했다. 그것은 단순한 감동이나 종교적 경건함과는 다른 종류의 감각이었다.

불협화음에는 긴장이 내재하며, 그 긴장은 대개 해결로 이어진다. 그러나 때로는 해결되기 직전의 불안정함이 가장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나는 종종 그 미묘한 긴장 속에 머무르기를 원한다. 아직 해소되지 않은 불안정함이 감각을 일깨우는 찰나, 나는 그 강렬함에 매료되어 그것이 펼쳐지는 시공간에 갇혀버리고 만다. 그때 긴장은 더 이상 해소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강렬한 엑스터시가 된다.

물론 바하가 이러한 심리적 효과를 의도 하진 않았겠지. 시대적 착오였든 몰이해에서 오는 것이든, 혹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든 분명히 거기엔 무언가가 있다.

이어 베르니니의 성 테레사의 황홀경을 떠올려 본다. 이 작품에서 신과 인간의 관계는 정신적이고 추상적인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성녀의 몸은 뒤로 젖혀지고, 입은 벌어지고, 옷자락은 격렬하게 소용돌이 친다. 성 테레사 자신의 기록에도 고통과 감미로움, 신의 사랑에 완전히 사로잡히는 감각이 공존한다. 그녀는 자서전 제29장에서 천사의 창이 자신의 심장을 관통하는 환시를 묘사하며, 그 고통이 극심하면서도 동시에 너무나 감미로워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고 기록한다. 그 경험은 두렵고, 동시에 황홀할 수 있다. (어쩌면 마조히즘 같기도 한데...)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힘에 완전히 사로잡히는 것, 숭고의 감각이 정신뿐 아니라 온몸을 관통하는 경험이었을 것이다.


Plaisir

일본의 오모테센케 다도에서는 손과 몸의 움직임을 극도로 제한한다.

일상생활에서 몸을 쓸때는 움직임 자체를 의식하지 않는다. 목적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물건을 집어 들어 다른 곳에 놓는 것이 목적이라면 가장 편하고 빠른 경로를 택하면 된다. 하지만 다도에서는 과정 자체가 목적이 된다. 손이 어디에서 출발하는지, 어떤 속도로 이동하는지, 언제 멈추는지, 다음 움직임으로 어떻게 이어지는지까지가 모두 형식의 일부이다. 그렇게 철저하게 통제한 움직임은 너무 자연스러운 나머지 마치 오히려 아무런 노력도 들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움직임들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인간의 자연스러움을 포기해야한다.

다도는 차를 우리고 즐기는 행위를 하나의 의식이자 예술적 경험으로 승화시키는 과정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우아하고 평온한 시간처럼 보이겠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오랜 시간동안 타다미 방에 꿇어앉아 차를 우리는 동안 다리는 저려오고, 값비싼 기모노가 몸통을 조이고 있다. 불편한 자세에서도 한치의 흐트러짐이 없어야 한다. 다음 동작을 서두르지 않고, 불필요한 움직임을 하지 않으며, 일정한 시간의 흐름을 유지한다. 손님들은 이 과정을 지켜본다. 마치 무대 위에 앉아있는 기분이 든다. 차를 우리는 행위는 아름다움이 구현되는 하나의 방식이자, 타인의 시선 속에서 완성되는 미학적 행위가 된다. 행위자는 동시에 관찰의 대상이 되고, 그 몸짓 하나하나가 미적 경험의 일부가 된다.

모든 제약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움직임을 완전히 통제하는 경험은 매우 특별하다. 긴장을 견딘다기 보다는 긴장 속에서 자신을 자유롭게 풀어두는 것이랄까. 중요한 것은 긴장이 그저 끝나기를 기다리는 불편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제약과 통제가 만들어 내는 고도로 집중된 미학적 경험, 몰입 그 자체이다.


일반적으로 몰입은 자기 자신을 의식하지 않고 행위에 완전히 빠져드는 경험을 의미한다. 그런데 다다미 위에서는 나 자신이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두 위치가 동시에 존재한다. 하나는 다다미 위에서 정해진 동작을 수행하는 나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 움직임 전체를 외부에서 바라보는 나이다. 행위를 수행하는 동시에, 그 행위가 하나의 장면으로 완성되는 것을 관찰한다. 이것을 실제로 자신에게서 분리된 상태라는 의미보다는, 수행자의 자기 관찰 능력과 무대적 의식이 결합한 경험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도 중요한 조건이 된다. 그들의 시선이 제약이면서 동시에 자신이 조직하는 공간의 일부가 되기 때문이다. 손을 움직이는 속도를 조절하면, 관객이 경험하는 시간도 함께 달라진다. 내가 말하는 시간의 지배는 바로 이런 것이다. 공간과 시간, 타인의 집중된 시간을 하나의 순간에 묶어 모두가 하나의 순간 속에 머무는 것.


Puissance

루이 14세는 실제로 무용수였고, 궁정발레는 그에게 단순한 취미가 아니었다. 왕이 자신의 신체를 어떻게 움직이고, 어떻게 시선을 받고, 어떤 위치에 서는가가 왕권을 표현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여기에는 아주 흥미로운 역설이 있다. 타인의 움직임과 시간을 지배하는 사람이 자신의 움직임에는 가장 엄격한 제약을 가한다는 것이다. 절대적인 권력은 신체의 자유로운 해방이 아니라, 오히려 육체를 극도로 세련되게 통제하는 행위를 통해 드러난다. 권력이 육체를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육체를 극도로 세련되게 통제함으로써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피숑의 손가락에서 루이 14세의 손가락 끝을 떠올린다. 그는 손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모든 제스처로 연주자들뿐 아니라 관객들마저 휘어잡는다. 그러나 그 움직임은 딱딱하지 않고 유연하고 섬세하다. 연주자들에게 지휘란 함께 음악을 만들어가는 행위이겠지만, 객석에서 바라보는 그 모습은 때로 아름다운 권력의 행사처럼 느껴진다.

피숑의 연주에서 처음 나를 사로잡은 것은 다이내믹이었다. 그러다 서서히 고개를 들어 관객들의 어깨 너머로 그의 손끝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단순히 손가락의 움직임이나 제스처가 아름다운 것이 아니었다. 그 움직임 안에는 아름다움과 연약함, 그리고 권위가 동시에 존재했다. 그는 그 공간에 있는 모두를 본인의 상상력 속으로 이끌고 가기를 원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안내자이면서 동시에 강렬한 의지를 가진 명령하는 자였다. 그의 손은 공간 전부를 휘저으며 모두의 호흡을 도둑질했다. 그것도 루이 14세의 개인 침실과 연결된 왕실 예배당. 오직 한 사람을 위해 마련된 공간, 절대 권력의 정점에 섰던 이의 숨결이 여전히 남아 있는 바로 그곳에서, 나는 또 다른 형태의 권위가 만들어지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 아름다움 속에 깃든 어떤 두려움과 위험을 느꼈다. 그 정체를 이해하기도 전에 이미 강렬하게 이끌리고 있었다. 매료되었든 설득당했든, 그 현상에 사로잡힌 뒤에야 비로소 내가 가진 경험과 생각으로 그것을 이해하려 한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다. 아름다움은 반드시 순진하거나 무해한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타인의 주의와 감정을 사로잡아,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그를 지배하는 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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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