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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들른 여름의 서울은 정말 많이 더웠다. 항상 내 생일에는 여름 끝자락의 마지막 소나기가 내린다. 지금 지내는 호텔은 전면 창 유리가 크게 하늘을 향해 뚫려있는 곳이다. 남산의 산자락이 나지막히 보이고 다양한 초록의 소나무들이 빽빽한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오늘 날씨는 참 맑고 구름이 참 아름다운 날이어서 하늘 위를 수놓는 구름의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는 내내 눈이 참 즐거운 하루였다. 동시에 저녁이 되니 노을이 져물어가며 하늘 위로 주황 빛을 펼치고,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 먹구름으로 하늘을 수놓았다. 어두운 구름 사이로 노을을 머금은 주황빛 해가 잠깐씩 얼굴을 내비췄다 사라진다. 유리창 너머로 방 안의 나무 캐비넷 위로 비쳐지는 내 그림자를 바라보다가 잠시 딴짓을 하고 돌아보면, 어느 샌가 그 그림자는 사라져 있다.
과거의 만든 가느다란 실이 오늘까지 연결 되는 것을 느낀다. 내가 그 끈의 매듭을 지었던 짓지 않았던, 상대방이 그 매듭을 지었던 짓지 않았던 상관 없이 한번 만들어진 실타래는 나의 미래까지 쭉 펼쳐져 있다. 그것들은 어느 순간에는 마치 없는 듯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자취를 감추었다가 어떤 특정한 순간이 되거나 어느 특정한 온도가 되면 흰색 실타래 속에서 삐죽 삐져나온 빨간 털실처럼 존재감을 드러낸다. 오랜만에 방문한 서울에서, 과거로부터 죽 이어져 온 실타래들을 본다. 오늘은 내가 아니라 그 어느 누구가 만들어 놓은 나와의 인연의 실을 보았다. 그것들은 그 당시에는 어떠한 빛깔이나 어떤 온도를 품고 있었을텐데, 그게 어떤 슬픔이었던 어떤 기쁨이었던 지금은 애틋함으로 기억한다. 혹은, 슬프게도 어떤 기억은 내가 더이상 갖고있지 않다. 그럼에도 형형색색의 실타래로 가득한 것만은 분명하고, 그런 내 삶을 애정한다.
결국은 여러 감정들보다 내 발끝이 어딜 향해있는가에 집중하게 된다. 안 그러면 나의 색을 잃어버리게 되니까. 그래서 그건 내게 늘 중요해왔다. 선택지는 늘 많아왔고, 지금까지는 거의 후회가 없었다. 어느 날 그 선택권이 나에게 없을 때도 있었지만, 후회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여러 이유를 찾아서.
문득 사라토가의 중국 음식점에서 오렌지 치킨하고 산라탕이 먹고 싶다. 하루가 끝나고 저물어 가는 저녁 노을을 뒤로한채, 하루가 어땠어 저쨌어 미주알고주알 얘기하며, 상대방의 존재 만으로 환히 비춰지던 식탁의 온기를 기억한다. 아무런 미래를 떠올리지 않은 채로, 공허함을 모두 내려놓은채로, 다시 그냥 나인채로 처음으로 돌아가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