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725

몇 주전부터 시애틀을 떠올리고 있었다. 시애틀은 샌프란시스코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도시임에도, 나는 그 긴 미국생활동안 시애틀에는 단 며칠 머물렀을 뿐이다. 그 아쉬움 때문에 미국을 떠나온 지금도 종종 그 도시를, 또 그 온도감을 떠올리곤 한다.

나의 기억들은 몇 가지 단편적인 조각들이다. 커피와 치훌리의 샹들리에, 숲에 둘러 쌓인 수도원, 저녁 늦게 지던 노을 등등. 그리고 희한하게도 휴스턴의 로스코 채플을 동시에 떠올린다. 많은 기억들이 뒤엉켜 있다. 로스코 채플을 갔던 그 때는 날씨가 그리 춥지 않았다. 오히려 해가 반짝였던 것 같다. 채플 정원에 심어진 하얀 골격의 자작 나무들과 노란 은행잎, 그리고 바넷 뉴먼의 커다란 조형물이 기억난다. 지금와서 하는 고백이지만, 로스코 채플 안은 비워짐으로 가득차있어서 그때의 나로서는 그 공간과 공명하기 무척 어려웠다. 대신, 나는 바넷 뉴먼의 조형물 앞에 한참 서있었다. 로스코를 존재하게 했던, 로스코를 누구보다도 아꼈던 바넷 뉴먼. 잔잔한 연못 위에 우뚝 솟아 있었던 바넷 뉴먼의 조형물은 단단하고 차가운 금속성의 커다란 기하학체 덩어리였는데, 그 모습이 이상하리만큼 이질적이었다. 주변 환경과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너무 혼자 우뚝 솟아 있었달까. 어떤 고집, 혹은 신념 같은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 뒤에는 바람에 휘날리던 가을날의 나무잎들. 날이 더웠는지 추웠는지는 기억이 잘 안나는데, 나뭇잎들이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던 모습이 마치 사이키 조명같이 너무나 현란해서, 그 기억이 내게는 뜨거운 온도감으로 남아있다.

런던은 이제 완연한 가을이다. 옅은 감기에 걸려 늦은 아침 일어났다. 옷을 여러겹 껴입고 나가서 라떼를 한 잔 시켰다. 라떼가 마시고 싶어서 라기보다는 그 온도감이 그리울 때가 있다. 특히 이렇게 살짝 몸이 차가운 날에는, 종이컵에서 전해지는 그 맨질함과 따뜻한 온기가 유독 다정하게 느껴진다. 최근에는 이사가게 될 집 때문에 무척 정신이 없었다. 사실은 햄스테드의 ‘저 골목’을 두고 떠나기가 몹시 망설여져서, 이 집을 살까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문득 마음속에 담고 있었던 이미지를 떠올렸다. 오래전 꿈에서 시작된, 막연히 나의 미래는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이미지. 그래서 어쩌면 이 집을 고집하는 것보다, 내가 언젠가 말했던 그 공간을 어서 만드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글을 쓰는 것. 오히려 방송을 할때가 나았다. 그 구구절절함을 음악으로 대체했으니까. 근데 무엇때문인지 방송을 다시 시작할 엄두는 나지 않는다. 아직은. 그래서 우선은 이렇게 글을 적어둔다. 내 공간이 생기고, 내가 익숙하게 했던 것들을 내 공간에 다시 들여놓기 시작하면, 그때는 다시 녹음을 시작할수도 있지 않을까. 미국에서부터 계속해서 원했던 건, 모든 소음으로부터 차단된 공간과 노트북이 올라갈 작은 테이블, 그리고 의자 하나였다.

Next
Next

917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