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826
날이 더워지며 반바지를 꺼내어 입기 시작하는 그 날을 좋아한다. 그리고 분홍색 스트라이프가 들어간 넉넉한 옥스퍼드 셔츠 하나를 걸치고 로퍼를 꺼내어 신는 것이다. 꼭 맨발이어야 한다. 꽁꽁 싸매고 있던 두툼한 겨울 옷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느낌, 살짝 쌀쌀한 공기가 맨다리에 닿는 느낌, 가벼운 옷들 사이에서 바람이 옷과 맨살을 스치는 느낌 모두를 좋아한다.
올 여름은 유독 더웠다. 그리고 나는 이제야 여름을 즐기는 법을 알게 된 것 같다. 땀이 맺힐만큼 덥더라도 밖에 나가 차양 밑에 앉으면, 뭔가 여름의 열기가 나를 지글거리며 괴롭히는 것 같으면서도 은은하게 내 몸이 데워지는 느낌은 마치 한증막에 들어있는것 처럼 상쾌한 기분이 든다. 얼음이 들어간 차가운 스피리츠 한 잔, 혹은 유자 향이 들어간 오이 칵테일 이런 것들로 더위를 달랜다. 너무 더운 낮에는 잠깐 차가운 수영장에 들어가 몸을 식히고, 잠시 썬베드에 누워 다시 열기로 몸을 데운다. 다시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기 시작하면 물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두어번 반복하다 보면 몸이 나른해진다. 그렇게 시에스타 시간에 맞춰 낮잠을 자고 일어나면 어느샌가 해가 조금씩 기울고 시원한 밤이 다가온다.
베니스에 다녀왔다. 8월 중순 즈음인가, 런던 날씨가 한풀 꺾이는 것 같았다. 곧 가을이 시작될 것 같아 두려웠다. 지난 2년 연속으로 너무 힘든 가을을 보내면서 이 여름이 지나가 버리면 나는 다시 우울해질 것만 같았다. 올해는 베니스 비엔날레가 열리는 해라서 이미 전시들은 예약이 되어 있었고, 더위가 가시기 전에 서둘러 베니스행 비행기를 예약했다.
2년 전에도 베니스를 찾은 적이 있었다. 비엔날레에 친한 선배의 아버지가 작품을 출품 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필 날짜를 잘못 맞춰 가는 바람에 모든 전시가 휴관이었다. 덕분에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며 먹고 마시고, 열심히 걸어 다녔던 기억이 난다. 해질녘 즈음엔가 지친 다리를 이끌고 카페 플로리안을 찾았다. 나무와 붉은 벨벳의 베네치안 양식으로 꾸며진 아름다운 곳이다. 그날은 더워도 너무 더웠다. 등에 무슨 털옷이라도 걸친 것처럼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이 현기증이 날 정도로 무겁고 덥게 느껴질 만한 날이었다. 그리고는 차가운 아이스 라떼와 체리 콤포트가 올라간 아이스크림을 시켰다. 광장에서는 지는 해가 마지막으로 타오르며 파사드의 기둥 사이사이로 긴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광장 쪽으로 난 하얀 차양 사이로 주황빛 노을이 스며들었고, 그 빛은 갤러리에 앉아 있던 한 여자를 비추었다. 의자에 앉은 여자는 팔다리가 길었다. 소매 없는 긴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손가락 끝에는 붉은색 매니큐어를 칠했다. 체리색만큼 짙지는 않고, 예쁜 장난감 자동차에 칠해져 있을 법한 그런 빨강이었다. 그녀의 시선 끝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약간 곱슬거리는 머리에 안경을 쓴 남자였다. 아마 둘 다 이 더위 속을 돌아다니느라 몹시 지쳤을 테지. 눈빛이 지쳐 보였다. 여자가 앉아 있던 파사드 안쪽에는 이미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지만, 남자가 서 있던 광장에는 해가 마지막 열기를 내뿜으며 지고 있었다. 여자의 입꼬리에는 수줍은 듯한 웃음이 맺혀 있었다. 반쯤 고개를 숙인 얼굴 위로는 그녀가 들고 있던 유리 물병에 해가 닿으며 반사된 빛이 아른거렸다. 아마도 남자는 그 모습을 찍고 있었던 거겠지. 그리고 순간이었다. 유리 물병이 대리석 바닥에 부딪히며 산산조각 났고, 유리가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작은 유리 조각들은 여전히 빛을 반사하며 반짝였다. 수많은 유리 알갱이들. 빛이 너무 강렬해 하얀 대리석 바닥을 계속 바라보고 있기도 힘든데, 유리 조각에서 반사된 빛까지 더해져 눈이 마비된 것 처럼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여자는 몸을 굽혀 조각들을 주우려 했다. 그러다 유리에 손을 베었는지 손가락에서 피가 나기 시작했고, 하얀 린넨 수건이 손가락을 꼭 움켜쥐었다. 남자는 광장에서 달려와 그녀를 진정시키고 서버를 불러 나머지 정리를 도왔다. 나른한 저녁노을 아래, 뜨거운 열기가 모두를 지치게 하고 모두의 눈을 멀게 만든 것만 같았다. 커플이 떠난 자리에는 그녀가 손가락을 움켜 쥐었던 린넨 수건이 놓여 있었다. 하얀 천 위로 빨간 피가 번져 있었다. 마치 그녀의 빨간 매니큐어가 물든 것만 같았다.
그들은 지금 무얼하고 있을까, 여전히 사랑하는 사이일까? 왜인지 그날의 기억 끝에는 깨진 유리 물병이 남아 있다. 바닥에 흩어져 마지막 햇빛을 반사하던 수많은 유리 조각들과, 그 사이에서 손을 베인 여자. 그리고 테이블 위에 남아 있던 하얀 린넨 수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