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726
불같이 뜨거운 여름방학을 보낸 뒤였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나는 이태리로 떠났다. 매일 30여분을 걸어서 성당을 찾아갔다. 성당 안에는 염원을 품은 사람들로 가득했고 종종 지나가시는 수녀님들의 하얀 옷자락이 빛과 그림자를 가르고 있었다. 나무 의자에 앉아 기도 소리를 듣다보면 한번씩 울컥하곤 했다. 그들의 절박한 표정 사이로 땀이 촉촉하게 베인 머리카락을 본다. 나무 의자에 피부가 쩍쩍 달라붙을 정도로 더운 날의 오후였다.
얼마간은 런던에 사는 친구가 놀러 왔다. 경치가 좋은 루프탑 바에 앉아서 식사를 하고, 판테온 앞에 있는 작고 허름한 바에 앉아 술을 마셨다. 어둑해진 광장에는 집시들이 나와 빛을 내며 빙글빙글 돌아가는 바람개비를 하늘 위로 높이 던졌다. 늦은 시간에도 그 빛을 쫓아가며 까르르 웃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어느 날 내가 신고 다니는 하나뿐인 신발의 끈이 끊어지고 말았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긴 줄을 서있었는데 너덜한 내 모습이 불쌍해 보였는지 문지기가 나를 안으로 먼저 들여보내 주었다. 성당에서 나와 집으로 가려던 찰나, 어느 수사님이 내게 오셔서 내 발을 씻어주고 싶다고 하셨다. 갑자기? 왜 그런 일이 벌어 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분이 내게 말씀하셨다. 나의 아픔과 힘듦을 위해 기도하며, 나는 이제 집으로 돌아가라고. 그날 이후로 나는 로마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는 어린 시절 같은 학교를 다녔던 친구를 마주쳤다. 그 친구는 빈에서 유학중이었다. 긴 비행 시간동안 우리는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친구는 바로크 시대의 즉흥연주에 대해 이야기했고,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슬쩍 마음이 들뜨는 것 같았다. 어쩌면 이 친구와의 조우가 이번 여행의 마지막 선물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는 방학 동안 서울에 머문다며 돌아가기 전에 다시 만나자고 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즉흥연주에 대한 호기심도, 그때의 설렘도 어느새 조용히 사라졌다.
비어있는 큰 공간을 뭘로 채울지 내내 생각했다. 매일매일 와인을 마시며 다 마신 와인병으로 방을 빙 두르기 시작했다.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공간은 생각보다 빨리 채워졌다. 한동안은 몇몇의 친구들이 스튜디오를 자주 찾아왔다. 그들은 피아노를 치고 깔깔거리며 웃었다. 흥에 취해 음악의 아름다운 부분들을 하나씩 해체했다. 이거 들어봐봐, 하며. 부분부분 토막난 음악구절들이 아무런 배경없이 툭 튀어나왔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왜인지 그것들을 조롱하는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의 아주아주 소중한 무언가를 빼앗아 까발리는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별 의미가 없는채로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어느 비가 엄청 오는 어느 날, 무작정 걸어서 연주장에 갔다. 비가 너무너무 많이 와서 긴 치마가 홀딱 젖었다. 치맛단이 발에 밟히면서 몇번이며 치마가 벗겨질 뻔 했다. 자주 그랬던 것 처럼, 연주장 앞에 앉아 모니터로 생중계 되는 공연을 보고 올 생각이었다. 하지만 공연장 앞의 텅빈 포이어는 차가운 에어컨 바람이 불어댔고, 비에 젖은 채로 계속 앉아있기엔 너무 춥고 구질했다.
8월의 어느 날이었다. 덥고 습하고, 그날도 비가 엄청 왔다. 친한 친구의 차를 타고 이동하는 중이었다. 이 친구는 참 진중한 친구였는데, 그 해 여름 몇번인가 술자리를 함께 했다. 운전 중에는 다른 말 없이 그냥 음악을 들었는데, 중간에 끊거나 흥에 취해 따라 부르지 않고, 그저 잠깐씩 눈을 마주치며 바로 그 순간임을 한번씩 확인하는 정도였다. 그런 교류가 오히려 더 깊은 이해와 울림을 전해주는 것 같았다. 어쨌든 그날은 비가 정말 많이 왔고, 우리는 왕복 8차로의 넓은 차도위에 있었다. 아무리 와이퍼를 작동 시켜도 창문 앞은 뿌옇게 보였다. 앞에 서있는 차들은 정체된 채로 빨간색 후미등을 켰다 껐다를 반복했다. 앞 창문을 타고 주륵주륵 흘러내리는 빗물에 유리가 흐느적거리는 것 같았다. 깜빡이는 불빛은 빨간 물감처럼 유리 위로 번져나갔다. 옆자리의 그 친구는 눈이 잘 보이지 않았던 말년의 모네가 떠오른다고 했다. 그가 바라보는 세상도 이렇지 않았을까?라며. 마침 라디오에는 말러의 아다지에토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창문 밖에는 가을의 색이 깊어지고 있었다. 나는 하얀 차이나 카라가 있는 연둣빛 오간자 셔츠를 입었다. 은은하게 비치는 소재였지만 그렇다고 야한 느낌은 아니었다. 그리고 회색 바지를 입고, 옅은 분홍빛 뱀피로 만들어진 하이힐을 신었다. 분명 학교로 향하는 길이었는데 왜 그렇게 입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택시는 산속에 난 좁은 길을 오르고 있었다. 양쪽으로는 은행나무가 줄지어 서 있었고, 노란빛의 나뭇잎들이 나뭇가지에 매달린 채 팔랑거리고 있었다. 이미 떨어진 나뭇잎들은 차가 지나갈 때마다 바퀴에 밟혀 뒤로 내팽개쳐졌다. 나뭇잎들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나뒹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