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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레즈 음악의 가장 큰 문제는 그가 치밀하게 계산해서 만든 음악이, 남들이 대충 무작위로 만든 소음과 결과적으로 비슷하게 들린다는 사실이었다. 이 글에서 그는 “결과는 비슷해 보일지 몰라도, 나의 음악은 엄격한 지적 훈련(규율)을 거친 것이고, 저들의 음악은 지적 나태함(방종)의 산물이다”라며 끊임없이 선을 긋고 있다. 적어도 나는 알고 한다는 것을 밝힘으로서 책임을 회피한다. 음악이 더이상 음악적이지 않은 것에 대해서.

불레즈는 관객이 그의 음악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 관객이 현대 음악의 진정한 논리(구조)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라고 말한다. “유행병”, “아마추어리즘”, “사창가” 같은 극단적인 단어를 쓰면서까지 끝임없이 자신의 지적 우월성을 강조하는 것은, 자신의 음악적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전략일 뿐이다. 결국 본인의(불레즈 자신) 음악이 소음처럼 들린다면, 그건 무질서해서가 아니라 너무나 고도화된 질서 때문이니 자신을 저급한 ‘우연성 음악가’들과 같은 도마 위에 올리지 말라는 일종의 선전포고인 셈이다.자신의 음악이 저열한 에피고니즘이나 딜레탕트 같은 이들 귀에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건 당연하지 않냐는 것이다.


불레즈는 본인의 음악이 이론적으로는 완벽한 질서를 갖고 있지만, 실제로 연주하면 아무런 논리도 없는 무작위적인 소음처럼 들린다고 설명한다. 이를 두고 “음표들이 복수를 한 것”이라고 표현하며, 결과적으로 “나쁘게 들리는 음악(Bad sounding)”이 되었다고 인정한다.


“우리가 음악을 종이 위의 숫자 놀이로만 다루다 보니, 실제 악기의 소리와 인간의 귀를 무시하게 되었고, 그 결과 이론만 거창하고 소리는 엉망인 ‘부조리한 음악’이 탄생하고 말았다.”


불레즈는 고전적인 음악 작법(화성, 대위법)이 무너진 자리에 세울 새로운 설계도를 제시한다.

  1. 화성적 기능의 상실: 예전처럼 화음이 주는 ‘긴장과 이완’의 법칙은 이제 작동하지 않는다.

  2. 수평(대위법), 수직(화성), 그리고 대각선: 전통 음악이 가로(선율)와 세로(화성)의 관계였다면, 현대 음악은 이를 연결하는 대각선적 차원의 조직이 필요

  3. 점(Point)과 그룹(Group): 개별 음표(점)들 사이의 관계, 혹은 음표 덩어리(그룹)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 음악을 구성


불레즈는 기존의 소나타 형식과 화성&대위를 대체하기 위한 시스템을 새롭게 구축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쓴다. 선배작곡가인 쇤베르크의 음악에서서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본인 또한 그 한계를 물려받을 순 없지 않은가. 그래서인지 글에서 불레즈는 “작곡은 아주 정밀한 지적 설계 작업이다”라고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다. 소리가 왜 그 모양(?)으로 들리는지 이 글을 읽다 보면 조금 이해가 간다. 철저하게 ‘머리’로 쓴 음악이니까.


하지만 그의 음악을 듣는 입장에서는 왜 음악을 이렇게 하나하나 다 찢어놨지? 라는 의문이 든다. 그의 음악은 전혀 유기체적이지 않다. 고양이 얼굴에 강아지 다리를 달고, 사람 눈을 달고, 새의 부리를 달아둔 것 같은 기괴하고 생경한 느낌을 받을 뿐이다.
기존의 음악에서 느끼던 ‘자연스러운 생명체’의 유기성 대신, 그의 음악에는 철저히 분해된 부품들을 재조립하는 ‘기계적 혹은 구조적 유기성’으로 가득차 있다.

“익숙한 생명체”를 죽여야 “새로운 구조”가 산다.
전통적인 음악(베토벤, 브람스 등)은 ‘주제’라는 심장이 있고, 그 심장에서 뻗어 나온 팔다리가 조화롭게 움직이는 유기체이다. 하지만 불레즈는 이런 방식이 이제 낡은 박제라고 생각했다. 그는 익숙한 조화(화성, 박자)를 해체(분해)하여 소리의 가장 작은 단위(점)로 만들었다. 불레즈가 기존의 맥락에서 의도적으로 ‘순수한 소리 부품’들을 잘라냈다.

”살아있는 생명체”가 아니라 “정밀한 건축물”
불레즈는 음악을 ‘자라나는 나무’가 아니라 ‘설계된 건축물’로 간주했다. 소리 부품들을 다 찢어놓은 이유는, 그것들을 새로운 논리(대각선 차원 등)로 다시 조립하기 위해서였고, 이들은 그가 정한 치밀한 위계와 인과 관계에 의해 억지로, 혹은 정교하게 맞물려졌다.

”일화적(Anecdotal)”인 것에 대한 혐오
불레즈는 음악이 무언가를 연상 시키거나(예: 산들바람, 슬픔 등) 일상적인 느낌을 주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소리 부품들은 맥락에서 이해되는 무언가가 아닌, 철저히 중립적인 재료가 되어야 했다. 그래서 일부러 그 ‘기능’을 할수 없도록 다 찢어놓고, 오직 구조적인 역할만 하게 만들었다. 결론적으로 불레즈의 음악이 무작위적으로 들리는 이유는 그의 의도된 기괴함이었다.


“이 요소들은 자신들에게 강요된 이질적이고 적대적인 질서에 격렬하게 반발하며, 그들 자신의 복수를 쟁취하네.”

그는 소리들이 서로 싸우고 튕겨 나가는 그 긴장감 자체가 현대적인 유기성이라고 주장한 셈이다. 청중에게 “기괴한 키메라”처럼 들린 그 음악이 불레즈에게는 '“가장 지적으로 완성된 새로운 생명체”였던 것이다.

이쯤되면 불레즈가 엄청나게 자기애가 강한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이 든다. 헤겔주의적이다, 모든게 자기로 귀결되고 있는. 하지만 그건 2차세계 대전때 참혹하게 겪지 않았나? 인간의 지성이 만들어낸 괴물의 참상으로.

불레즈의 음악은 듣기에 더이상 음악이 아닌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글들이 매력적인 이유는 모든 개별적인 파편들을 자신의 거대한 ‘절대적 논리’ 체계 안으로 통합하고 있기 때문이다.(음악이 아니라라?) 그 오만함과 치밀함은 그 전 세대가 겪었던 한계를 그대로 답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실제로도 “2차 세계대전의 비극과 인간 지성의 괴물성”이라는 비판은 불레즈 동세대의 작곡가들이 평생 안고 갔던 가장 아픈 모순이기도 했다.

지성으로 지성의 비극을 씻으려 한 역설
2차 세계대전은 인간의 합리성과 과학 기술이 어떻게 대량 학살이라는 괴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보여준 참상이었다. 불레즈를 포함한 전후 세대 예술가들은 정반대의 결론을 내렸다.“감성이나 선동적인 정치가 비극을 만들었으니, 우리는 누구도 끼어들 수 없는 가장 차갑고 엄격한 지적 질서로 도피하자”는 것이다. 그들은 음악에서 인간의 냄새(감정, 기억, 서사)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오히려 다시는 그런 비극에 선동당하지 않는 길이라고 믿었다.

“파괴된 세상"의 거울상
‘다 찢어놓은 것’과 같은 그 기괴한 형태학은, 사실 전쟁으로 완전히 가루가 되어버린 유럽 문명의 모습 그 자체이기도 했다. 불레즈는 과거의 아름다운 선율을 그대로 쓰는 것이 오히려 ‘위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세상의 파편들을 그대로 가져와 자신의 논리라는 ‘강력한 접착제’로 억지로 붙여놓은 것인데, 그 모습은 음악적 이해가 없어서 라기 보다는 생명력을 잃은 억지로 보일뿐이다.

지독한 자기애와 ‘절대 정신’
불레즈의 글에서 ‘모든 것이 자기로 귀결’되고 있는 사실이 증명되고 있다. 그는 보들레르의 입을 빌려 “거장들이 나를 통해 당신(나)에 대해 말하게 하겠다”고 하며, 역사조차 자신의 음악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쓰고 있다. “나는 절대적으로 옳다”는 회유적인 모든 표현들 속에서 전형적인 독재적 지성의 모습 또한 엿보인다.

결론적으로 불레즈는 인간을 믿지 못하고 논리만 믿기로 결정한 듯하다. 그는 자신이 만든 이 복잡한 미궁(음악)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그 열쇠를 쥔 유일한 설계자로 존재한다. 인간의 지성이 만들어낸 이 ‘논리의 괴물’은 전쟁의 참혹함을 떠올리게 하는 지적인 공포와 경직성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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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글에서 암묵적으로 하나의 전제를 두고 있다. 음악은 청각적으로 질서와 아름다움이 지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불레즈의 입장은 다르다. 그에게 음악의 구조는 반드시 즉각적인 ‘인지적 투명성’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니다. 질서는 감각적 직관에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작품 내부의 구조적 조직 속에 존재한다. 다시 말해, 음악의 논리는 귀에 곧바로 포착되는 것이 아니라, 분석과 사유를 통해 접근되어야 하는 체계일 수 있다.

청취 가능성이 곧 미학적 성공을 의미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예술은 언제나 지각의 한계를 확장해 왔고, 난해함은 종종 새로운 감각의 탄생을 예비해 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한 가지 질문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음악이 청각적 아름다움을 상실하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여전히 음악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음악이 더 이상 ‘듣는 행위’ 속에서 질서와 감동을 생성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어떤 존재 방식으로 남는가?

이 질문은 단순한 보수적인 미적 감각의 호소가 아니다. 실제로 청취 가능성과 구조적 정밀성을 동시에 성취한 사례는 음악사에 수없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Johann Sebastian Bach나 Heinrich Schütz의 작품은 극도로 치밀한 구조적 조직을 지니면서도, 청각적으로 분명한 질서와 아름다움을 제공한다. 구조적 엄밀성과 감각적 설득력은 반드시 대립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문제는 ‘질서’ 그 자체가 아니라, 질서와 지각 사이의 관계 설정 방식에 있을지도 모른다.

또한 불레즈가 관객을 비판했다고 해서 곧바로 그를 자기애적 인물로 규정하는 것은 성급할 수 있다. 그를 개인적으로 오만한 ㅇ인물이라고 단정짓기보다, 전후 유럽 아방가르드의 급진적 전통 안에 위치한 작곡가로 이해해할 수도 있다. 특히 다름슈타트 세대를 중심으로 형성된 전후 음악 담론은, 전통과 타협하지 않으려는 강한 역사적 의지를 공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급진성은 개인의 성향이라기보다, 시대적 상황에 대한 응답으로 이해하는 편이 더 타당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는 전후 독일·프랑스 음악계의 역사적 맥락을 보다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결국 불레즈의 주장을 해체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비판을 넘어서는 대안적 미학이 요구된다. 예술은 이해 가능성을 의무로 지니는가? 난해함은 실패의 징후인가, 아니면 의도된 전략인가? 만약 난해함이 전략이라면, 그 전략은 어떤 방식으로 청중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가? 그리고 만약 음악이 구조적 엄밀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청각적 아름다움을 희생한다면, 그것은 확장인가, 축소인가?

이 논의는 결국 한 가지 더 근본적인 질문으로 수렴한다. 음악은 ‘구조’인가, ‘경험’인가, 아니면 그 둘 사이의 긴장 속에서만 성립하는 사건인가? 불레즈의 음악을 둘러싼 논쟁은 단순히 한 작곡가의 미학을 평가하는 문제가 아니라, 음악이라는 예술 형식이 어디까지 지성의 영역으로 이동할 수 있는가를 묻는 문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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