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levés d'apprenti (1942–1946)
견습 시절의 기록
Alain Galliari, dir., Catalogue de l’œuvre (Paris: Éditions de la Philharmonie, 2025), 21–26.
1925년에 태어난 피에르 불레즈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스무 살이었다. 세계사의 거대한 단절선 위에서 스무 살을 맞는다는 것은 곧 미래를 손에 쥐는 것과 같다. 그의 세대는 이를 곧 깨닫게 된다. 1943년 새 학기부터 그는 파리에 머물며 음악 공부를 마무리하고 있었는데, 그 공부는 사실 불과 2년 전 리옹에서 비로소 시작된 것이었다.
루아르(Loire) 지방의 옛 포레(Forez) 백작령의 수도였던 몽브리종(Montbrison)에서 태어난 그는 예수회가 운영하는 빅토르 드 라프라드(Victor de Laprade) 학교에서 일반 교육을 받았다. 피아노는 어린 시절 개인 교사에게 처음 배웠고, 이후 생테티엔(Saint-Étienne)의 다른 교사에게 계속 사사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1940~1941학년을 보내며 바칼로레아를 취득하게 된다. 프랑스는 이미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었다. 열다섯 살의 불레즈에게 음악은 무엇보다도 큰 열정이었다. 다만 그가 당시 음악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려면, 라디오 방송 외에는 음악이 거의 스며들지 않던 환경에서 자란 한 소년이 들을 수 있었던 것들을 상상해야 한다. 그의 음악적 경험이라 해봐야 모든 피아노 학습자가 익히는 레퍼토리, 곧 모차르트, 베토벤, 쇼팽, 멘델스존, 그리고 체르니를 포함한 작품들이 거의 전부였다. 그러나 불레즈는 어린 시절의 종교 의식을 오래도록 기억했다. 특히 성주간(Holy Week)의 장엄한 전례는 빅토르 드 라프라드 학교 합창단이 맡아 진행했는데, 그는 그 합창단에서 소프라노 독창 파트를 부르기도 했다.
“나 역시 종교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곳에는 합창단이 있었고, 나는 아홉 살 때부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게 많은 것을 가져다주었고, 나의 음악 교육에 크게 기여했다. 내가 가장 아쉬워하지 않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것이다.”
제한적이기는 했지만 깊은 흔적을 남긴 이 음악적 경험은 이후 그의 여러 작품 속 응답창과 화답 형식(répons et d'antiennes)에서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 Troisième Sonate 〔50〕에서 Rituel 〔75〕, Anthèmes 〔93, 99〕에 이르기까지 그러하다. 젊은 불레즈는 자신의 첫 작품 가운데 하나인 《La Mort》 〔10〕를 라프라드 학교 합창단을 지휘했던 모메(Maumey) 신부에게 헌정하기도 한다.
이 지방 시절 동안 음악의 씨앗은 분명 뿌려졌다. 그러나 그것이 본격적으로 싹트기 시작한 것은 젊은 불레즈가 리옹에 도착하면서부터였다. 그는 1941년부터 1943년까지 두 학년 동안 또 다른 종교 학교인 라자리스트회(Lazaristes)가 운영하는 쿠르 소뇨(Cours Sogno)에서 수학반 학생으로 공부했다.당시는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 전쟁과 독일 점령은 갈리아의 수도였던 리옹의 예술 활동을 크게 제약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리옹에는 앙드레 클뤼탕스(André Cluytens)가 지휘하는 필하모닉 협회와 오페라 극장이 있었다. 덕분에 소년 불레즈는 교향악단의 연주를 직접 들을 수 있었고, 몇 차례 오페라 공연도 관람할 수 있었다. 그는 훗날 무소르그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를 보았고, 최근 작품으로는 아르튀르 오네게르의 《죽음의 춤(La Danse des morts)》(클뤼탕스 지휘), 그리고 자크 티보(Jacques Thibaud)가 연주한 시마노프스키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신화(Mythes)》를 들었던 일을 기억하게 된다.
불레즈가 태어난 몽브리종은 지금도 인구가 약 1만 6천 명 정도인 작은 도시이다. 가장 가까운 수도인 리옹에서 차로도 1시간 20분, 기차로는 2시간 20분이나 걸린다. 1925년 불레즈가 태어났을 당시에는 지금보다도 더 작은, 사실상 지방 소도시였다. 파리나 리옹처럼 음악 교육의 중심지가 아니었고, 전문 음악가를 배출하는 환경도 아니었다.
오히려 불레즈의 어린 시절은 상당히 제한된 환경이었다. 집안은 음악가 집안이 아니었고, 아버지는 공학 계열 사업을 하며 아들이 공학을 공부하기를 원했다. 음악 교육도 개인 피아노 레슨 정도가 전부였다. 오케스트라 연주를 거의 접할 기회가 없었다. 현대음악은 물론, 대규모 콘서트조차 쉽게 들을 수 없는 환경이었다. 세상에..
그래서 불레즈가 1941년 리옹으로 간 것이 매우 중요한 사건인 것이다. 리옹에서 그는 처음으로 오페라를 보고, 교향악단을 듣고, 니농 발랭을 만나고, 리오넬 드 파흐만에게 화성과 작곡을 배우기 시작한다. 그리고 1943년 파리로 올라간 뒤 메시앙을 만나면서 비로소 세계적인 작곡가의 길이 열리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불레즈 자신도 어린 시절의 음악적 환경이 매우 제한적이었다고 여러 차례 회고했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에게 큰 영향을 준 것은 예수회 학교의 전례 음악과 합창단 경험이었다. 그래서 《Répons》, 《Rituel》, 《Anthèmes》 같은 후기 작품에서도 전례 음악의 구조를 연상시키는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는 해석이 나오는 것. (역주)
결정적인 만남은 1942년 여름 방학에 이루어진다. 불레즈 가족은 생보네르샤토(Saint-Bonnet-le-Château)라는 아름다운 마을에서 여름을 보내고 있었다. 마침 그곳에는 전간기 프랑스 성악계를 대표하던 소프라노 니농 발랭(Ninon Vallin)이 머물며 반주자를 찾고 있었다. 마을의 약사가 젊은 불레즈를 추천했고, 이 만남은 훗날 그의 경력에서 첫 번째 연결고리가 된다.
여름 방학 마저도 어디 로마나 파리같은 큰 도시로 간 게 아니라, 생보네르샤토는 불레즈네 집에서 겨우 30분 거리임.(역주)
무엇보다도 니농 발랭은 불레즈를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리오넬 드 파흐만(Lionel de Pachmann)에게 소개했다. 그는 프란츠 리스트가 높이 평가했던 피아노의 거장 블라디미르 드 파흐만(Vladimir de Pachmann)의 아들이었다. 불레즈는 그의 지도로 피아노 공부를 계속했고, 처음으로 화성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1943년 자신의 첫 작품인 《Psalmodie》〔11〕를 그에게 헌정하게 된다. 니농 발랭은 젊은 불레즈의 재능을 곧바로 알아보았고, 그의 음악적 소명을 적극적으로 북돋아 주었다. 또한 1943년 새 학기에 그가 파리에 정착하는 일도 도왔다. 그녀의 소개로 불레즈는 파리 오페라의 수석 하피스트이자 자메 오중주단(Quintette Jamet)의 중심 인물이었던 피에르 자메(Pierre Jamet)를 만나게 된다. 이 만남이 불레즈가 하프라는 악기에 유난히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계기였을까? 어쨌든 그는 이후에도 자메 가족과 깊은 우정을 이어 갔다. 이를 증언하는 인물이 바로 피에르 자메의 딸이자 하피스트였던 마리클레르 자메(Marie-Claire Jamet)이다. 그녀는 훗날 도멘 뮈지칼(Domaine musical)과 앙상블 앵테르콩탕포랭(Ensemble intercontemporain)의 연주회에도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모든 것은 결국 리옹에서 시작되었다. 불레즈는 1942~1943년에 자신의 첫 작품들을 쓰기 시작했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자필 악보의 수는 많지 않지만, 이 책의 첫 장에서 소개되는 그 악보들은 놀라울 만큼 잘 보존되어 있다. 작곡가는 수십 년 동안, 그리고 여러 차례의 이사를 거치면서도 그것들을 간직했고, 마침내 1980년대에 파울 자허 재단(Paul Sacher Stiftung)에 기증하여 후세에 남기게 되었다.
어쨌든 작곡은 아직 젊은 불레즈가 자신의 첫 번째 소명으로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당시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피아니스트가 되는 일이었다. 1944년 가을, 그는 파리 음악원 고등 피아노 과정에 입학을 시도한다. 입학시험에는 합격했지만 예선에서 탈락하고 만다.
이 가혹한 실패는 그가 파리에서 보낸 첫 시기의 가장 큰 좌절이었다. 그렇다면 이로부터 무엇을 결론지을 수 있을까. 적어도 그는 피아니스트가 되지는 못하리라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는 조르주 당들로(Georges Dandelot)의 예비 화성학 반에 입학하여, 1944년 1월부터 10월까지 작곡의 길로 들어서기 시작한다. 그의 동급생 가운데에는 앙드레 보라부르(Andrée Vaurabourg)의 조카가 있었는데, 보라부르는 아르튀르 오네게르의 아내이기도 했다. 이 부부는 불레즈의 초기 경력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오네게르를 통해 불레즈는 장루이 바로(Jean-Louis Barrault)를 비롯한 파리의 음악·예술계에 발을 들이게 되었고, 보라부르에게서는 1944년 4월부터 1946년 5월까지 2년에 걸쳐 엄격한 대위법 수업을 받았다. 그는 이 과정에서 자신의 예술의 토대가 되는 내적 청취 능력과 확고한 작곡 기법을 익히게 된다. 불레즈는 훗날 보라부르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메시앙앙 다음으로, 아니 어쩌면 메시앙과 더불어, 그녀야말로 그의 가장 견고한 스승이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올리비에 메시앙에게서는 1945년 1월부터 6월까지 6개월 동안 화성학을 공부했고, 최고상을 받았다. 그는 메시앙에게서 새로운 작품들의 세계를 흡수한다. 스트라빈스키와 바르토크, 드뷔시와 라벨의 작품들, 그리고 그때까지는 부분적으로만 알고 있던 앙드레 졸리베나 이반 비시네그라드스키(Ivan Wyschnegradsky)의 음악까지도 그러했다. 또한 세르주 니그(Serge Nigg), 장루이 마르티네(Jean-Louis Martinet), 이베트 그리모(Yvette Grimaud)와 같은 보다 앞선 동료들을 만나면서 르네 레이보비츠(René Leibowitz)를 알게 되고, 빈 악파를 발견하게 된다. 처음에는 쇤베르크, 무엇보다도 베베른이었다. 이제 작곡에 대한 열정은 그의 존재를 완전히 사로잡는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여기에 쏟아붓는다. 강인한 노동력, 타협 없는 엄격함, 그리고 드물 만큼 뛰어난 사유 능력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Prélude, toccata et scherzo》〔16〕에서 《Douze Notations pour piano》〔22〕에 이르기까지, 이 시기에 쓰인 작품들은 젊은 작곡가가 경험한 격렬한 발견의 시기를 그대로 증언한다. 그는 자신이 마주한 다양한 작곡 기법들을 자신의 언어 속으로 통합하려 애쓴다. 스트라빈스키의 리듬, 바르토크적인 대위법, 메시앙과 졸리베의 주문같은 선율 세계, 비시네그라드스키의 사분음,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에 이르기까지. 여기에 더해 그는 모리스 마르트노(Maurice Martenot)에게 직접 배우며 마르트노 전파악기(Ondes Martenot)를 익히고, 아프리카와 극동의 음악 전통이라는 미지의 음향 세계도 접하게 된다. 이러한 발견은 기메 박물관(Musée Guimet)에서 일하던 마디 소비조(Mady Sauvageot)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녀는 1931년 식민지 박람회를 위해 직접 채록한 녹음 자료를 음악원의 몇몇 학생들에게 들려주었다. 불레즈 안에서 앞으로의 모든 것이 불과 몇 달 사이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그것은 그의 초기 악보들을 풍요롭게 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1945년 6월 11일 화성학 경연대회 심사 보고서에서 심사위원장은 불레즈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가장 뛰어난 재능. 한 명의 작곡가.”
이것이야말로 그가 이제 스스로를 규정하는 방식이 되었다.
A.G.